Author Archive: ilpyongkim

회고록 (56) 격동의 시기를 살아온 老學者, ‘민족의 성공’을 기원하다

“타인과 다른 점을 인정하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 바로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한국인은 여러 인종의 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미국의 이민사회에서 성공한 민족이라고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배타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인종간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한민족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 한민족은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성공한 민족이라고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연재글로 나의 회고록도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긴 시간이었지만 돌아보면 한순간 주마등처럼 지나가버린 삶의 순간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삶의 순간들 속에서도 반짝거리는 인생의 의미는 충만했다고 생각한다. 회고록을 연재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야 겠다.

1953년 9월에 미국에 유학 올 때 나의 첫 번째 목표는 서울대에 입학했다가 1950년 6월에 발생한 한국전쟁 때문에 다하지 못한 학업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비극적인 전쟁은 한반도의 청년들에게 그랬듯이 나의 운명마저 바꿔놓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미군 제8군사령부에서 통역 겸 행정보좌관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그 후 나는 대한민국 육군연락장교 제7기생 모집에 응모해 소정의 훈련을 받은 후 대한민국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나는 6·25 전쟁 당시 한국육군의 장교로서 미국의 장교들과 함께 북한의 군사정보와 중공군의 북한개입에 관한 문헌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중공군에 관한 책이나 글은 비록 번역판이었지만 많은 내용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것이 훗날 나의 학문적 관심과 학자의 길을 예비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학자의 길을 예비한 운명

앞의 회고록에서 거듭 밝혔듯 미국으로 건너온 나는 켄터키주의 애스베리 대학에서 학부를 끝마친 후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원에 진학했다. 콜럼비아대 대학원에 다닐 때 중국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또 1949년 중국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의 중공에 관해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컸다. 공부를 하려면 중국어부터 습득해야 했다. 마음을 굳힌 나는 중국어 즉 만더린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중국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국방장학금(National Defense Educational Act Fellowship)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함께 공부할 수 있었다. 국방장학금을 신청하기 위해서 중국어 선생을 비롯해서 대학원 교수 두 명의 추천서가 필요했다. 처음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로레타 판(Loretta Pan)이라는 중국인 여자선생이 추천서를 잘 써 줘서 국방장학금 (NDFL)을 받을 수 있었다. 좋은 여건이 이렇게 ‘행운’처럼 찾아왔기 때문에 나는 밤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전적으로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대학원 시절 나는 중국어와 중국역사, 중국정치와 중국외교사 강의에 등록하고 현대중국에 관한 책을 많이 더 넓게 접하면서 제대로 된 중국 연구를 하고 싶은 학문적 갈망으로 가득했다.

그렇다고 마냥 순탄하게 공부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콜럼비아 대학원에서 중국문제를 연구하고 있을 때 찾아온 애로사항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국어를 미국학생들과 함께 공부할 때 나는 漢字를 많이 알고는 있었지만 중국식 어휘를 나열(표현)하는 방법과 발음 면에서 곤혹을 치러야 했다. 한국에서 배웠던 한자와 발음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중국어를 가르치는 판(潘)여사는 매우 엄격한 선생이었다. 내가 한자를 알고는 있지만, 미국에서 사용하는 한자의 나열법이나 발음은 한국이나 일본에서 쓰는 어휘 나열 방법, 발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녀는 강조했다. 판 여사는 내가 미국학생들과 똑같이 중국어 기초지식부터 배워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나는 이미 한자를 千字이상 알고 있는데 왜 더 공부하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중국식으로 발음하고 중국식으로 중국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기초지식부터 배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찌나 화가 났던지 중국어 공부를 집어치울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었다. 중국어를 제대로 해야 다음 공부의 수순을 밟을 수 있었기에 나는 할 수 없이 판 선생이 시키는대로 따라 가야 했다.

그렇게 중국어를 2년 동안(4개 학기) 배운 후 나는 어느 정도 입이 트였다. 중국 <人民日報>와 <紅旗>와 같은 중국간행물을 콜럼비아대 동아시아도서관(East Asian Library)에서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코스워크가 다 끝나고 중국어와 러시아어의 어학시험도 패스했다. 이제 박사학위 논문 준비에 들어가기만 하면 됐다. 내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할 때에는 중국공산주의 운동과 중국의 정치에 관한 연구는 이미 상당한 수준(레벨)에 도달해 있었다. 따라서 다른 대학원생이 쓰지 못한 분야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써야만 박사학위 논문심사에서 유리하고, 또 책으로도 출판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다. 미국에서는 박사학위 논문이 대학출판사에서 출판되느냐에 따라 그의 학문적인 명성이 결정된다. 그리하여 나는 중국공산당 운동의 江西 소비에트時代(1928~1934)에 관한 논문을 쓰는 것이 어떻겠냐는 주임교수 도크 바네트 박사의 조언에 따랐다.

박사논문 출판이 가져다 준 기회들

중국 강서 소비에트 시대는 1924년에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國共合作을 하고, 1927년에 파탄이 나기 시작해 중국 국민당이 중공군을 토벌할 때 국민당의 국부군이 강서성 소비에트 기지를 포위하고 공격해 공비소탕전을 전개하던 시기를 말한다. 당시 중국의 국부군 사령관이었던 첸청(陳誠) 장군이 중공군 포위작전으로 강서소비에트 기지를 압박, 제1차부터 제5차에 걸쳐 포위작전을 진행하는 동안 공산당으로부터 다량의 문서를 노획했는데, 국민당 정부에서는 이를 ‘陳誠文庫’라고 불렀다. 진성문서는 이후 대만의 칭단에 보관돼 왔다. 내가 눈독을 들인 자료는 바로 이 진성문고였다. 나는 칭단에 있는 국민당 비밀문서 보관소를 방문해 강서시대의 공산당문헌을 열람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대만대학의 대학원에서 중국역사를 연구하고 있던 박일근 교수(대만대학 유학생)가 많은 도움을 줬다. 진성문고는 후에 미국의 학자들을 위해 ‘마이크로 필름’으로 중국서적이 있는 도서관에 보급됐기 때문에 나의 박사학위 논문을 보완 수정해 학술서적으로 출판할 때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미국에서는 박사학위 논문이 책으로 출판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서 학자의 미래가 결정된다. 나는 나의 박사학위 논문을 보완 수정해 가주대학 출판사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에서 출판했기 때문에 중국전문가이자 정치학자로 미국 학계에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 인디애나대와 콜럼비아대에서 중국정치와 외교 과목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이 학위논문 출판의 힘일 것이다. 미국의 학문 풍토라고 할까, 박사학위 논문의 대학출판부 출판 여부에 따라서 테뉴어(종신교수직)도 결정되고, 또 학자로서의 위치도 측정할 수 있다는 게 보편적 시각이다.

박사학위 논문이 책으로 출판되면서 학자로서의 나의 신분에 미묘한 변화가 찾아왔다. 인디애나대 정치학과에서는 나의 박사학위 논문이 가주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된다는 소식을 듣고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진급시켜줬으며, 동시에 테뉴어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아주 좋은 제안이었지만, 내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코네티컷주립대(University of Connecticut)에서 중국정치와 외교정책을 가르치는 교수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정보를 내게 전해준 사람은 코네티컷주립대 역사학과의 중국역사교수인 허만 매스트였다.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코네티컷주립대로 옮길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코네티컷주립대로 옮기면 부교수로 진급시켜줄 뿐만 아니라 테뉴어(종신교수직)까지 줄 수 있다고 했다. 인디애나대에서 받는 연봉의 2배나 되는 급료도 솔깃했다. 상황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코네티컷주립대측으로부터 인디애나에서 코네티컷주의 수도 하트포드까지 왕복여행을 할 수 있는 항공표를 급행우편으로 보낼 것이니 직접 방문해 면접을 하라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나는 매우 주저했으나 도서관학 석사를 받고 직장이 마땅치 않은 나의 처 정현용 박사의 취업가능성도 있다는 제안에 코네티컷주립대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나는 가족(나의 처 현용, 장녀 애련이, 그리고 차녀 금련이)를 설득해 뉴욕에서 2시간 거리에 있고, 또 동부에 있는 코네티컷주립대로 옮겨갔다. 1970년 봄 학기 강의가 끝나고 6월에 인디애나대를 떠나서 장장 12시간의 자동차 드라이브 끝에 코네티컷주립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1970년 가을 학기부터 코네티컷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코네티컷에서의 새로운 출발

코네티컷주립대로 옮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엄마가 도서관학 석사학위를 공부하는 동안 장녀 애련이를 서울의 어머님에게 맡기고 있었는데, 이제 다시 미국으로 데려오는 문제가 큰일이었다. 때마침 셋째 처제인 정명자가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펜실바니아주립대의 로버트 오리버(Robert T. Oliver) 박사의 지도하에 석사학위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 오는 기회가 마련됐기 때문에 애련이를 데려오는 문제는 쉽게 풀렸다. 우리 가족은 이삿짐을 코네티컷으로 보내고, 승용차에 가족을 태우고, 3일 동안 운전을 한 후 드디어 코네티컷주로 이사했다. 1970년 가을부터 코네티컷주립대의 교수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 장녀인 애련이는 매우 문학적이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머나먼 길을 떠나서 중간에 2박하고 3일 동안 무사히 코네티컷 주에 도착한 내용을 여행기로 쓰기도 했다.

나는 코네티컷주립대로 옮긴 후 콜럼비아대에서 매달 한 번씩 열리는 ‘중국세미나(China Seminar)’에 참석했다. 또 하버드대의 ‘동아시아’ 교수 세미나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이 때가 나의 교수생활에서 제일 활동적이고 학술논문 발표도 왕성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논문발표 등 학술 활동 기회는 동북부 지역에 있는 코네티컷주립대로 옮긴 후 더욱 활발해진 것이다. 그리고 뉴욕의 한인회 행사와 한국인 문화행사에도 참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정현용은 코네티컷주립대에서 교육학으로 박사학위(Ph. D.)를 마치고 부근의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도서관 관장으로 30년간 근무한 후 은퇴했다. 우리의 인생항로에서 코네티컷 주의 생활은 그 어느 시기보다 매우 행복했다. 지금 돌이켜본다면, 학자로서 개인적 명성도 의미 있었지만, 조국의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는 자부심도 이 시기에 가장 컸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20여명에 가까운 한국 유학생을 우리 대학원에서 석사(M.A.)와 박사(Ph. D.) 학위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며, 학위를 받은 후 이들이 한국의 여러 대학과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교육자의 긍지를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다. 나의 회고록은 나의 80 평생의 기록이다. 나의 인생의 동반자인 정현용 박사에게 이 회고록을 증정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위대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의 경구를 인용하고자 한다. 토인비는 명저 『역사의 연구』에서 “교만한 민족과 나라는 반드시 그 다음에는 패망한다”라고 역설한 바 있다. 교만과 배타성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반드시 고쳐야할 것들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는 사유와 생각의 개방성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과 다른 점을 인정하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 바로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한국인은 여러 인종의 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미국의 이민사회에서 성공한 민족이라고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배타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인종간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한민족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 한민족은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성공한 민족이라고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끝>

*<교수신문> 인터넷판으로 연재된 김일평 교수의 회고록에 성원을 보내주신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김일평 교수의 회고록은 곧 단행본으로 출간할 계획입니다.

회고록 (55) 東北工程 합리적 해결 위해 나선 국제한국학회

필자의 오랜 학문적 관심 가운데 하나가 동북아지역 질서 문제다. 그래서 수년전 중국이 벌였던 역사왜곡도 깊은 관심을 갖고 생각해왔던 문제였다. 이른바 ‘동북공정’이라 불리는 중국의 동북아 과거 역사 연구는 훗날 발생할지도 모를 영토문제를 둘러싼 중국의 역사 정리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마침 수년전에 발표했던 작은 논설이 있어, 다시 생각의 단초를 잡아 보겠다.

동북공정이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輿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인 말로서 중국 동북 변경 지방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중국측의 일련의 연구 작업을 뜻한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5년 계획의 이 프로젝트는 중국 사회과학원 소속 변강사지역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이 주관이 돼 추진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우리 한민족의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의 고구려 땅을 중국영토라고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북한을 포함하는 우리 한국역사는 한족(朝鮮族)의 역사이지 중국 漢族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고구려 종족은 고대중국의 소수민족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따라서 동북지역에 존재했던 고구려 땅은 중국의 변경지역이라는 게 그네들의 ‘급조된’ 주장이다.

<보스톤 코리아>에 필자가 게재한 ‘중국의 동북공정이란 무엇인가’ 평론.

위 사진 속의 평론 「중국의 동북공정 이란 무엇인가」는 미국 <보스톤 코리아(Boston Korea)>의 청탁을 받고 집필한 글인데 ‘보스톤 전망대’ 코너에 게재했던 글이다 (2007년 8월 10일).

고구려사의 왜곡과 우리의 대응

중국이 고구려역사를 왜곡하고 고구려 땅을 중국의 영토로 편입시킨다는 소식은 한국인에게는 매우 충격적이다. 그리고 한국의 언론은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보도를 매일 하고 있으며 한중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다. 우리 한국인의 냄비 끓는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며 아우성치는 모습을 중국은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우리가 감정을 앞세우고 중국과 싸울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무모한 일이다. 우리는 중국이 언제부터 왜 동북공정을 시작했으며 어떻게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할 것인지 지성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대 조선역사의 고구려, 발해가 중국의 종속국이었다는 대규모 프로젝트로 2002년 2월에 사회과학원이 200억 위안(한화 2조여 원)을 투입하고 정식으로 시작한 국책 사업이다. 그러나 동북공정의 프로젝트는 실제로는 1983년에 벌써 시작됐다. 이런 사실을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는 1984년 8월 베이징의 민족대학 린 야오한 교수의 초빙을 받고 민족대학의 민족문제연구소와 연변대학에서 특강을 한 경험이 있다. 그 당시 중국은 외국인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없었다. 중국정부기관이나 학술단체의 정식초청이 없으면 비자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베이징의 대학 초빙을 받아도 연변은 외국인 출입금지 지역이라 중국 공안부의 특별여행증을 받아야 갈 수 있었다.

민족대학의 일정을 마치고 연변대학 박문일 학장의 특별초빙으로 연변대학에서도 특강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린성사회과학원에 들렸다. 베이징에서 연변대학까지 나를 안내하고 동행한 황유복 민족대학 교수는 지린성사회과학원의 중국인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고구려는 확실히 조선 땅이고 조선역사인데 어찌하여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실토하는 것을 보았다. 중국은 1983년에 벌써‘동북변강의 역사와 그에 따라 파생되는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북공정 연구프로젝트는 중국의 고대역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조선족 학자들에게도 매우 충격적이었다.

나는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경을 거쳐 서울에 들렸다. 너무도 충격적인 중국당국의 역사 왜곡 사실을 서울에도 알리고 대응방안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울대의 중국사 교수이며 친분이 있는 민두기 교수와 외교학과 은사인 이용희 교수에게 중국의 역사왜곡 사실을 전하고 대응방안을 촉구했다. 그리고 한국동란당시 육군통역장교 전우이며 미국유학 동기며 직업외교관 출신인 노신영 안기부장에게도 연변에 다녀온 이야기를 나누면서 연변대학에 한국역사학자들이 쓴 책을 좀 보내주기를 부탁했다. 한국에서 출판된 학술서적 50여권을 연변대학에 보냈다. 2년 후 연변대학을 다시 방문했을 때 내가 보낸 한국 책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본 결과 대학도서관 ‘적성불온문서’방에 넣었기 때문에 일반에게는 공개할 수 없고 특별허가를 받아야 열쇠를 얻을 수 있고 열람할 수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1980년대 광주사태’ 후 한국의 혼란한 정국은 중국언론에도 많이 보도됐으며 한국이 중국을 적성국가로 규정하고 중국에 대한 여행뿐만 아니라 모든 교류를 차단했고 외교통상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알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알려줘도 아무런 대책을 세울 여유도 없었고 또 관심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오늘 한국과 중국은 외교통상이 매우 활성화됐으며,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제일 교역국가로 부상했다. 그리고 중국의 한국유학생 수는 미국유학생 수를 능가했다는 보도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었다. 이와 같이 한국과 중국은 상호의존국가로 부상했다.

그렇다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국수주의적이고 감상적인 접근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단순하지만 이것이 원칙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서로가 존중하고 진심으로 대하기만 하면 충분히 지혜를 갖고 관심사를 적절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했다.

중국, 한국, 북한에는 고구려역사와 조선고대사를 연구한 학자들이 많이 있다. 한국에는 4~5명의 역사교수가 고구려사와 고대사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국, 북한, 중국의 고대사연구 학자들이 공동으로 고구려사를 연구하고 공동발표를 하는 동시에 3개 정부는 전문분야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수용한다는 협약이 필요하다. 북한의 학자와 중국의 고구려역사 전문가는 한국역사학자의 입장을 실증적으로 고증함으로써 우리의 고구려사는 조선고대사의 일부라는 정통성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큐슈대학에서 열린 학술대회

한국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할 수 있는 이론과 역사적 사실을 공개해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역사학자들이 공감 할 수 있는 이론과 역사적 근거를 내놓고 설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학자와 북한의 역사학자, 그리고 한국의 역사학자를 초빙해 동북공정에 대한 학술적 토론을 개최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나는 한 것이다. 따라서 나는 우선 미국의 우리 국제한국학회가 중심이 돼 동북공정에 관한 학술회의를 개최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한국 측과의 연락은 서울대 정종욱 교수가 적극적으로 취진하기로 했고, 미국 측은 내가 맡았고, 중국 측과 북한 측은 국제한국학회의 명의로 초빙하기로 했다.

동북공정에 관한 학술회의는 중국 베이징이나 혹은 일본에서 개최하는 가능성을 검토해 보았다. 그리고 일본의 큐슈대학(九州大學)의 방문교수로 재직중인 이홍표 박사에게 연락했다. 일본의 후쿠오카 부근에 있는 큐슈대학은 일제시대부터 한국과 연관이 매우 깊었고 또 한국의 많은 유학생이 이 대학을 졸업하기도 했다. 큐수대학의 법정대학에서 강의하는 이홍표 박사와 연락을 한 결과 학술회의의 모든 경비를 우리 국제한국학회에서 부담하는 조건으로 큐수대학에서 ‘동북아시아 변경역사연구 국제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2007년 7월20~21일 일본 큐슈대학(九州大學)에서 개최한 ‘동북아시아 변경역사연구 국제회의’를 끝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오른쪽에서부터 정종욱 서울대 교수, 필자, 마쓰바라 타카토시(松原孝俊) 교수), 이홍표 교수.

2007년 7월20~21일 일본 큐슈대학(九州大學)에서 개최한 ‘동북아시아 변경역사연구 국제회의’를 끝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오른쪽에서부터 정종욱 서울대 교수, 필자, 마쓰바라 타카토시(松原孝俊) 교수), 이홍표 교수.

그러나 학술회의를 개최하는데 드는 경비조달이 문제가 됐다. 서울에서 개최하면 경비 면에서는 일본에서 필요한 경비의 반액으로 가능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오는 학자들과 북한에서 오기로 한 3명의 학자들의 입국절차가 매우 복잡해 일본 후쿠오카에 있는 큐슈대학의 ‘한국연구센터’에서 개최하면 중국과 북한의 학자도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중국의 사회과학연구원 그리고 북한의 사회과학연구소를 방문해야 했다. ‘동북공정’ 연구에 참여하고 있는 중국 학자 4~5명과, ‘동북공정’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는 북한 학자 3명을 초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미국에서 동경을 통해 베이징, 장춘을 거쳐서 북한의 평양까지 갔다. 평양에서는 사회과학원의 曺喜承 박사가 두 명의 젊은 연구원을 데리고 큐슈의 동북공정 학술회의에 참석해 중국학자들의 동북공정에 대해 반론을 내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해서 2007년 7월 20일부터 이틀간 큐슈대학에서 ‘동북아시아변경 역사연구 국제회의’를 개최할 수 있었다.

<계속>

회고록 (54) ‘한미안보연구회’와 공동보조 …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어떤 기대감

국제한국학회 (International Council on Korean Studies)는 1996년 3월16일 뉴욕에서 창립됐다. 재미동포의 지도자로 널리 알려진 현봉학 박사를 이사장으로 모시고 필자가 초대회장으로 추대됐다. 필자는 회장에 당선됐을 때 다음과 같은 수락 연설을 했다. “이 단체가 국제사회에서 학술활동을 통해 남북한의 상호이해를 증진시키고,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한국일보, 1996년 3월 21일)

국제한국학회는 이날 채택한 정관을 통해 비영리단체 및 편파적이 아닌 단체임을 명시하고 앞으로의 사업을 위해 본부를 워싱턴에 두고 매년 1회 학술대회를 개최해 한반도의 통일과 한반도와 관련된 논문을 실은 학술지(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Studies)를 매년 4회 발행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국제한국학회는 1996년 11월 16일 워싱턴에서 제1차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북한, 남한 및 미, 중, 일, 러시아 학자들을 초빙했다. ‘The Two Koreas in World Affairs’라는 주제하에 정치, 경제, 군사 등 8개 분과로 나누어 토의를 전개 했다. 제1차 국제한국학회의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은 수정과 보완을 거친 후 학술지 제1호에 수록해 1997년에 발행했다. 매년 한미관계와, 한중관계, 한일관계, 한러관계 등 국제 외교관계를 많이 다뤘으나 2007년 7월 21일~22일에는 일본 큐수대에서 동북공정에 대한 학술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국제한국학회의 학술지인 IJKS 표지.

국제한국학회(ICKS)의 창립후 벌써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국제한국학회가 주최자로 매년 개최되는 학술회의에는 동아시아 연구 분야에서 많은 학술논문이 발표됐다. 발표된 논문은 수정보완 한 후 영문학술지인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Studies에 특집으로 실었다. 그동안 김휘국 박사는 국제학술지의 편집장으로서 수고를 많이해 한국문제 연구학술지로 학계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국제한국학회는 한국의 ‘한미안보연구회’와 공동으로 매년 학술회의를 서울과 워싱턴에서 번갈아 가면서 개최하고, 한미안보 문제에 관한 학술논문을 학회에서 토의한 후 국제학술지에 발표했다. 미국의 한미안보와 한반도의 국제정세에 관심이 있는 연구생과 학자들이 많이 논문을 기고했다. 과거 17년 동안 한반도의 외교안보문제를 다루는 유일한 학술지로 성장한 것을 국제한국학회를 창립한 우리 멤버들은 우리인생의 보람으로 생각한다.

위의 사진은 국제한국학보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Studies)의 제1권 제1호의 사진과 제15권 제1호의 표지를 찍은 사진이다. 지난 17년간의 국제한국학회의 발전상과 한국학 연구의 발전을 증명하고 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필자의 회고록도 이제 거의 마무리 지을 때가 다가왔다. 한국전쟁과 미국 유학, 그리고 미국에서 정치학자로 삶의 거의 대부분을 살아왔던 나의 회고록에 몇 가지 글을 덧붙이는 걸 독자들이 양해해줬으면 좋겠다. 먼 이국땅에서도 한결같은 생각은 조국의 통일이다. 필자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해외동포라면 누구나 다 조국이 한시바삐 평화통일 되길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다음은 그런 마음을 담아 발표했던 짧은 글이다. 논문 형태지만, 여기서는 간략한 방식으로 소개하겠다. 제목은「학자의 입장에서 본 남북통일의 길」(2000)이다. 분단이후 최초로 남북 두 정상이 머리를 맞대는 2000년 6월 14일 역사적인 ‘남북정삼상담’을 앞두고 쓴 글이다. 지금 시점에서 본다면 다소 다른 전망도 가능하겠지만, 분단 55년, 2000년대를 맞는 시점에서 ‘정치학자’로서 필자가 가졌던 생각의 얼개라 그대로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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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의 입장에서 본 남북통일의 길

한반도가 분단 된지도 벌서 55년이 됐다. 그러나 2000년대를 맞이해 남북통일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국민의 정부가 햇볕정책을 수립하고 북한 포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금년 6월 12일~14일에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는 희망이 보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분단의 역사를 회고해 볼 때 한민족은 분단의 비극으로 많은 희생을 당한 피해자라고 말 할 수 있다. 분단 때문에 120만의 직계가족이 생이별을 했고 700만의 이산가족이 생겼다. 그리고 6·25 전쟁으로 200만의 한국인이 희생됐고 수백만의 가족이 離散됐으며, 공중폭격으로 막대한 자산피해가 있었다.

미국은 UN군의 일환으로 한국전에 참전해 미군 3만 6천명이 전사했고, 10만 3천여명이 부상당했으며 8천여명이 실종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외국에 비쳐진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분단·분쟁지역으로 전쟁이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위험한 지역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남북한에 살고 있는 7천만 한민족은 통일을 염원하고 있다. 분단세대는 70대와 80대의 사람들로 죽기 전에 통일된 한국을 보고 싶어 한다. 6·25세대는 벌써 50대와 60대로 진입하고 있다. 6·25동란 후에 출생한 세대는 60%가 넘었고 한민족의 대부분이 한반도의 분단이 생긴 원인도 모르고 통일이 왜 안 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나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한반도의 통일정책을 학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 해외한민족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냉전시대의 통일논리

한반도의 분단을 상징하는 38선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 때문에 생겼다. 따라서 한국인은 강대국정치의 희생물이 됐고 한민족이 겪고 있는 분단의 고통은 분단 극복으로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반도가 통일이 되면 분단의 고통인 민족의 갈등과 동족간의 전쟁은 없어지는 것이다. 즉 한반도의 분단은 강대국 간의 냉전으로 생겼기 때문에 한반도의 통일은 냉전구조가 해체돼야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냉전이 끝난지도 벌서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유일하게 냉전구조가 그대로 남아있고 남북통일은 아직도 요원하다. 분단은 한민족에게 여러 가지 고통을 안겨주었다. 전쟁공포는 국민의 가슴을 눌렀고 경직된 사상 이데올로기는 국민의 창의적 사고와 능력을 가로막았으며 과다한 군사비는 한민족의 복지 경제발전에 장애물이 됐다. 그러나 21세기에는 통일이 이뤄지고 남북이 하나 돼 새 천년을 일궈 갈 것이라고 한민족은 확신하고 있다.

냉전시대의 통일정책은 이승만 정권부터 김영삼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반세기동안 냉전시대의 사고방식과 강경노선 일변도의 정책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은 한국전쟁도 불사했고, 5·16후의 군사정권은 반공을 국시로 해 북한을 타도하고 통일을 하겠다는 정책이었다. 전두환의 신군부 정권도 박정희 정권의 통일정책을 계승하고 냉전시대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해 남북 사이에는 적대관계가 유지되는 반면에 상호간에 전쟁을 피하고 조국통일을 평화적으로 이루고자하는 의도에서 대화와 협상도 동시에 진행됐다. 다시 말하자면 양면 전략을 사용한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통해 한국을 통치한 박정희 정권은 조국의 경제발전을 우선순위에 놓고 ‘선 개발 후 통일‘의 정책을 선택했기 때문에 남북통일은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1970년대와 1990년대에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에 호응해 남북한 사이에도 긴장이 완화되고 대화가 시작됐다.

1989년 냉전체제의 종식은 '혁명'의 종주국에서부터 시작됐다. 시민들에 의해 쓰러진 레닌 동상은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새로운 시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표상이다.

1989년 냉전체제의 종식은 ‘혁명’의 종주국에서부터 시작됐다. 시민들에 의해 쓰러진 레닌 동상은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새로운 시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표상이다.

1991년부터 시작된 남북한의 고위급회담(총리회담)에서는 ‘남북 사이에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했으며 부수적으로 ‘남북 고위급회담 분과위원회 구성, 운영에 관한 합의서’와 ‘남북고위급 개최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고 또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도 발표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1970년대 초기에 미소 데탕트로 인해 7·4공동성명이 발표된 것과 같이 1990년대 초기에는 냉전이 종식되고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됨으로써 남북한은 1991년에 남북합의서를 발표하도록 강요당했던 것이다.

1993년에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3단계 3기조의 통일정책을 수립했다. 문민정부의 통일정책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다양하게 전개됐던 통일정책의 토대 위에서 좀 더 전진적이고 구체적으로 이론화된 통일정책이라고 평가 할 수 있다. 3단계 통일정책은 남북연합의 준비 단계(화해협력 단계), 남북연합 단계를 거쳐서 통일의 단계에 진입하는 것으로 돼 있다. 이와 같이 통일의 3단계를 좀 더 깊이 있게 수렴하고 증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3기조가 필요했다.

문민정부의 통일정책 3대 기조는 △민주적 국민연합 △공존공영 △민족복지 증진 등이었다. 이와 같은 통일정책의 3단계 구도와 3기조는 서로 보완이 되는 동시에 좀 더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제시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 문민정부는 북한 붕괴론에 집착했기 때문에 냉전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다. 1990년에 냉전이 종식됐음에도 불구하고 냉전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고수했기 때문에 새로운 통일정책이 나올 수가 없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무력을 사용해 통일의 목표를 성취한 하나의 예는 월남전에서 월맹이 승리하고 남북을 통일한 선례가 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1950년에 북한이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해 한국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UN군의 개입으로 통일은 이뤄지지 못하였고 분단은 계속됐다.

중국도 모택동이 게릴라 군을 조직하고 국민의 혁명의식을 고취함으로서 국민정부군(국부군)을 격퇴시키고 중국대륙을 통일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아직도 대만통일의 과업이 남아있기 때문에 중국도 분단국가의 하나로서 통일의 과업이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3개의 분단국이 생겼는데 월맹은 유일하게 무력으로 통일했고 동독과 서독은 흡수통일을 이뤘다.

1990년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돼 냉전이 종식됐을 때 서독은 동독을 흡수해 통일을 이뤘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해 통일한 것과 같이 남한도 북한을 흡수통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문민정부는 예측했다. 그러나 북한체제는 붕괴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10년이 지난 후에도 북한체제는 붕괴되지 않았으며 흡수통일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고 한 권의 책을 써도 다 해명할 수 없을 것이다.

냉전이 종식되고 소련권이 붕괴됐을 때 동구의 공산주의 체제는 함께 붕괴됐다. 그러나 중국을 비롯해 북한·월남의 사회주의 체제는 붕괴되지 않았다. 서방의 전문가는 유교권의 공산주의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유교문화에 접목시키고 서양사상을 동양문화에다 토착화했기 때문에 동구권의 공산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강조한다. 중국에는 마오쩌둥 사상, 북한에는 김일성의 주체사상, 그리고 월맹에는 호지명의 반식민지 독립사상이 정치체제의 기본 이데올로기가 됐기 때문에 탈냉전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서방의 전문가는 판단하고 있다.

북한의 붕괴를 희망사항으로 전제해 대북 정책을 세운 문민정부의 통일정책은 실패작이었다. 북한에다 쌀을 보내고 비료를 공급하면서 북한과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북한은 거절했다. 문민정부는 북한의 연착륙정책으로 북한의 붕괴를 유도했다. 그러나 북한은 쇄국정책으로 연착륙정책에 대항했다. 연착륙정책은 북한으로 하여금 개방하고 개혁의 길을 선택하면 舊소련같이 붕괴된다고 확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북한은 서서히 개방하기 시작했고 경제체제도 개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북한체제의 붕괴를 피하기 위한 비상조치에 불과했다. 북한이 붕괴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의 대북 정책의 변화는 불가피 하게 됐다.

통일의 형태

한반도의 통일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전문가들 중에는 남북한이 어떤 형태로 통일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그 모델을 모색하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다. 이는 ‘합의된 통일 모델’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13세기 전의 통일신라의 형태로 돌아가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조선조 500년의 왕조시대로 복원하는 것인지, 또는 일본제국주의의 35년간의 식민지시대의 모델로 돌아가는 것인지 통일 모델이 없다. 통일하고자 하는 의욕은 있으나 어떠한 모델의 통일이 바람직한 것인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1948년에 대한민국이 수립됐을 때 통일된 한반도의 정치체제는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한다고 헌법에 명시해 놓았다.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1948년에 수립했을 때 인민민주주의를 그들의 국시로 했다. 50년이 지난 1998년까지 한국에는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지 못했다. 그 반면에 북한은 1972년에 인민민주주의를 전환시켜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었다. 남쪽에는 군사독재가 정치를 지배했고 북쪽에는 사회주의 독재가 정치를 지배했다.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남북한의 정치체제를 고찰해 볼 때 우익독재와 좌익독재 체제가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상적인 통일이란 불가능했다.

북한의 통일정책은 한국전쟁 후 평화통일론이 기조를 이뤘다. 그와 동시에 민족해방론을 통일정책으로 선택하기도 했다. 민족해방은 남한이 미국의 식민지치하에 있기 때문에 남한국민을 해방시켜서 북한에 흡수통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월맹의 통일은 민족해방의 통일모델이다. 1954년에 소련의 흐루시초프(Khrushchov, Nikita Sergeevich)가 등장해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변화시킴으로서 북한은 주체사상을 체계화하고 우방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통일을 성취하겠다는 정책을 수립했다.

그러나 북한의 통일정책은 1960년 해방 15주년을 맞이해 김일성이 제안한 연방제 통일안이 그 기조를 형성했다. 그 후에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연방제 통일정책은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으면서 1972년 7월 남북회담에서 7·4 공동성명을 발표함으로써 통일 3대 원칙인 체제와 사상을 초월해 자주적이고 평화적으로 민족 대 단결의 통일원칙을 남북이 합의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북한은 일관성있게 연방제 통일방안을 주장했던 것이다.

북한은 1980년 10월 10일에 개최한 노동당 제 5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이 행한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안’을 제의함으로써 1960년부터 주장해온 통일정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남북한에는 서로 다른 제도가 존재해 왔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사상과 제도를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들은 같은 한 나라 안에서도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같이 살 수 있으며 또한 통일된 하나의 국가 안에 서로 다른 제도가 함께 존재할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연방공화국 설립을 통한 남북통일을 주장했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설명하는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설명하는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의 설립원칙으로 김일성은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으로 남북한이 동등한 권한과 의무를 갖고 각각 지역자치를 실시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또한 연방형식의 통일국가에서는 남북한이 똑같은 수의 해외동포의 대표들이 참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와 같이 북한은 해외동포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해외동포가 통일에 동참하는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해외동포의 역할을 민족 대 단결의 원칙에서 대표를 선출하해 조국통일에 이바지해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국민의 정부와 햇볕정책

1998년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의 통일정책은 ‘햇볕정책’이라고 불린다. 김영삼 정부의 통일정책보다 매우 전진한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통일정책은 북한이 붕괴된다는 가정아래 북한을 흡수할 수 있는 대북정책을 세웠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북한은 붕괴하지 않는다는 가정아래 북한에 대해 포용정책을 선택했다. 포용정책은 한반도에서 공존공영의 구조를 창출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미국의 대북 정책 기조가 되고 있는 ‘페리 보고서’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한반도에서 냉전구조를 해체시키고 평화공존의 구조가 이뤄지면 남북대화를 통해 통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국민의 정부 대북포용정책 동북아 평화연구회, 1999, The Kim Dae-Jung Government: The Sunshine Policy, The Society for Northeast Asian Peace Studies, 1999 참조).

북한의 중앙통신은 2000년 3월 1일 남한의 대북 “포용정책은 안보를 바탕으로 우리 (북한)를 개혁 개방에로 유도해 붕괴시키려는 심히 반동적이며 범죄적인 반동대결 정책이다”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3월 9일 베를린 선언에서 남북 경제협력 확대, 이산가족문제 해결, 한반도 평화정착, 남북 당국간 대화 정상화 등을 선언하고 남북한의 정상회담을 이끌어 냈다. 분단 55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남북의 정상인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6월 12일~14일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하게 되는 것이다.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남북의 정상이 무엇보다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긴요한 의제는 북한이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는 북미간의 평화협정 체결, 미군의 철수 문제, 남북사이의 군축문제다. 민족의 화해와 단합, 교류와 협력 문제는 평화와 통일문제를 해결하면 자연히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정착 문제는 주한 미군의 철수와 북미간의 평화협정문제와 직결돼 있기 때문에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미군의 철수 없이 한반도의 군축문제가 해결될 수 없고, 북미간의 평화협정 없이는 한반도의 평화는 정착될 수 없다는 것이 북한의 일관성 있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이목 즉 귀와 눈은 한반도의 정상회담에 집중되고 있다. 과연 남북한의 정상이 55년간의 냉전구조를 청산하고 분단과 분쟁을 해소하며 화해와 협력으로써 남북한의 통일을 외세의 간섭이 없이 자주적으로, 또 평화적으로 이룰 수 있으며, 나아가 민족의 대단결을 성취할 수 있겠는지 한민족의 긍지와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이번 기회를 어떻게 활용 할 것인가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갖고 관측하고 있다. 7천만 한민족의 운명은 민족통일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

회고록 (53) 국제한국학회, 세계 학자들의 이목을 끌다

국제한국학회는 1996년 3월 16일에 창립됐다. 우리 조국은 일본 식민지통치로부터 해방된지 50주년이 지난 다음 해였다. 왜 우리가 국제한국학회 (International Council of Korean Studies)를 창립했는지, 학회 조직 배경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ICKS 창립과 남북통일 학술회의

국제한국학회는 1996년 창립 이후 매년 50명 내지 100여명의 한국 관련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와 연구위원들이 참여해 그들의 연구결과를 논문 형식으로 발표해왔다. 그리고 연차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은 일정한 절차를 거쳐서 국제한국학회의 기관지 <국제한국학보(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Studies)> 에 발표되고 있다. 나는 <국제한국학보(IJKS)>의 초창기 편집장으로서 학술지의 권위를 세우고 또 학계의 인정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그동안 국제한국학보는 20여년의 역사를 창조했다.

 국제한국학회(ICKS)는 홈페이지를 구축해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활동상을 엿볼 수 있다. 사진은 회원관련 부분이다. http://www.asia-studies.com/

국제한국학회(ICKS)는 홈페이지를 구축해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활동상을 엿볼 수 있다. 사진은 회원관련 부분이다. http://www.asia-studies.com/

다음의 글은 국제한국학회 창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종합적인 배경을 간결하게 설명한 것이다.

International Council on Korean Studies

국제한국학회의 창립

회장: 김일평, 부회장: 이항렬·신의항·이태영, 사무총장: 김휘국

오늘 국제한국학회 후원회 창립총회 및 기념 특별 간담회에 참석해주신 여러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국제한국학회는 1996년 3월 16일 새로 출범했습니다. 한반도의 분단 50주년을 맞이해 해외에 살고 있는 우리 한민족은 무엇을 어떻게 하면 한민족의 통일을 이루겠는지 연구하고 또 통일정책을 개발하기 위한 학술연구 단체로 출발했습니다. 통일문제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우리 후손들에게 보급해 그들의 정체성을 찾는 데에도 기여하는 것이 우리 학회의 목적입니다. 그동안 150여명의 학자와 전문가 그리고 많은 지식인들이 회원으로 참여했습니다.

제1차 학술회의는 워싱턴에서 개최됐습니다. 120여명의 학자, 미국정부에 근무하는 연구원, 전문직 사람들이 참가해 훌륭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박건우 대사가 축사를 하고 많은 전문가들이 기조연설을 했습니다. 발표된 일부의 논문은 <국제한국학보(The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Studies)> 창간호에 수록했습니다.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연구하고 또 우리의 자녀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교육시켜서 그들의 정체성을 찾아주기 위해 우리 학회는 해마다 두 차례 학술지를 발간합니다.

제2차 학술회의는 지난 10월 23일~24일 워싱턴에서 한미안보연구협의회와 공동으로 개최했습니다. 駐韓 미대사를 역임한 그레그 대사, 워커 대사도 참석했고, 주한미대사로 지명받은 보스워스 대사는 ‘한미관계의 전망’에 대한 주제연설을 했으며, 합참의장인 셀톤 대장도 한미안보관계에 관한 오찬 연설을 했습니다. 제3차 학술회의는 내년 6월에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제1차와 제2차 학술회의는 정치와 안보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조명했습니다. 그러나 제3차 학술회의는 남북경제교류 문제, 문화교류 문제, 상호간의 교류와 협력문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또 재미동포의 동참을 위한 정책방향을 제시하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호응과 참여를 바라고 있습니다.

국제한국학회는 우리 한국인 1.5세와 2세들의 정체성과 민족통일에 관한 그들의 인식을 연구해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방법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후세들에게 남겨 줄 수 있는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연구하고 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일문제에 관해 우리 한민족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관심을 갖고 통일을 염원하고 있습니다.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 한민족의 중지를 모아서 우리세대의 분단 상태를 해결하고 우리 후세들이 정체성을 확고히 찾고 또 그들에게 통일된 조국을 보여주기 위해 국제한국학회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우리의 후세들이 한민족에 대한 정체성을 확고하게 지니고 미국사회에서 긍지를 갖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더라도 조국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에 대해 관심을 항상 갖고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또 우리의 후세들이 미국사회에 진출해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한민족으로서 한국을 빛낼 수 있는 전문인으로 성장하도록 도움을 주는 일에 여러분은 동조하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외에 살면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 국제한국학회의 활동에 동참하셔서 한국에 대한 정체성을 찾고 우리 이민생활의 의미를 찾기 위해 항상 노력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조국의 통일을 이루고 우리 후세들이 한국인이라는 긍지를 갖고 미국사회에서 성공해 조국을 빛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데 동참하셔서 인생의 보람을 느껴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 후원회 창립을 위해 여러 가지로 수고해 주신 강태성 사장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저의 인사말씀을 갈음하겠습니다.

김휘국 박사의 헌신과 국제고려학회와의 차별성

국제한국학회의 본부는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에 두기로 하고 김휘국 박사가 사무총장의 중책을 맡았다. 김휘국 박사는 한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에서 소대장과 중대장을 지냈으며, 영관급으로 복무하는 중 선발돼 한국 육군사관학교의 교관으로 임명돼 생도들을 훈육하다 교관으로서 미국 유학 기회를 얻은 엘리트다.

그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의 카톨릭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가 다니는 카롤릭대에는 한국군의 장성 출신이신 김응수 박사가 경제학과 교수로 있었다. 그 인연인지 그는 이 카톨릭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석사와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김휘국 박사의 부인은 법무부 건물 지하실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부부가 열심히 미국생활을 하며 아이들 교육에 전염하고 있었다. 국제한국학회 초창기에 김휘국 박사는 물심양면으로 공헌한 바가 많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국군 小將 출신인 김응수 박사를 고문으로 모시고 국제한국학회를 1996년 3월 창립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국제한국학회는 국제고려학회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라는 의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소개하면 먼저 국제고려학회(ISKSA)는 북한의 노선을 지지하고 일본 조총련이 보내주는 기금으로 설립, 운영되는 학회였다. 그러나 국제 한국학회(ICKS)는 재미한국인 학자들과 기업인이 주로 기금을 만들어서 조직돼 운영되고 있으며 한국의 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 혹은 통일문제 연구기관과 긴밀한 연결과 학술교류를 통해서 연구기금을 확보했다. 설립 주체와 운영 기금에서 명확한 성격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국제한국학회는 매년 학술회의를 워싱턴에서 개최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발표된 한반도 문제와 통일문제 등 코리아에 관한 연구논문은 수정 보완한 후 국제한국학회의 학술지 <국제한국학보(IJKS)>에 소개되고 있다. 1년에 두 번씩 출판되는 이 학술 저널은 미국의 각 도서관은 물론 미국정부의 한반도와 동아시아 담당 관계자들에게 배포되고 있다.

국제한국학회는 창립 이후 다양한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해왔다. 학회 홈페이지에서 관련 컨퍼런스를 볼 수 있다.

국제한국학회는 창립 이후 다양한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해왔다. 학회 홈페이지에서 관련 컨퍼런스를 볼 수 있다.

국제한국학회의 학술지는 미국의 학계뿐 만아니라 세계 학계의 인정을 받아서 각 대학의 동아시아 담당 교수 중에는 학술논문을 집필해 <국제한국학보>에 투고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미국 대학의 테뉴어(Tenure) 즉 종신교수직은, 주로 학술논문 4~5편과 학술연구 서적을 몇 권 집필했느냐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 학회의 저널 <국제한국학보(IJKS)>는 미국의 한국인 학자뿐만 아니라 해외의 다양한 학자들도 기고를 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학자들 논문 투고

그렇다고 모든 논문이 쉽게 실리는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일본 후크오카에 있는 큐슈대(九州大)에서 개최한 동북공정에 관한 학술회의의 경우를 소개하면 이렇다. 당시 학술회의에 제출됐던 미국, 중국, 한국 학자들의 학술논문의 몇 편은 국제한국학회의 학술지에 실리기도 했다. 중국측 연구자와 실무자들이 발표한 논문은 미국이나 일본의 학술연구 논문에 비해 차이점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국제한국학회 학술지에는 싣지 않기로 결정했다. 중국측 연구자와 한인 학자들의 발표논문은 국제한국학회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볼 수 있다.

국제한국학회의 창립 20주년이 되는 2016년에는 창립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대대적인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중국, 일본, 러시아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한국전문가를 워싱턴 혹은 서울에 초빙해 다양한 학술논문을 발표하는 국제한국학 대회를 개최할 기획도 구상 중이다. 한국의 국제교류재단과 미국의 연구기관에서도 관심을 갖고 후원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다음은 국제한국학회(ICKS)를 창립을 할 때의 영문 취지문이다.

국제한국학회의 창립(International Council on Korean Studies) 의 배경과 목적

The International Council on Korean Studies (ICKS) was founded in March 16, 1996 as a non profit and impartial organization dedicated to the advancement of Korean Studies and related academic and professional research in the field of Korean Affairs in the United States as well as abroad through international conferences, seminars, publications and other relevant activities. The Council aims to promote aerial consciousness of the significance of Korean affairs and issues of the Korean Reunification among the professionals and the new generation of Koreans and Korean Americans. During the past three years the ICKS has achieved the twin goals of convening conferences and of publishing its journals,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Studies (IJKS). The membership has increased to more than 200 and the readers of the journal reached one thousand professionals and scholars in the United States and abroad. The IJKS will be published twice a year beginning the year 2000 with financial grant from the Korea Foundation. The Council is also planning to launch in 2000 an outreach program by which the younger generation of Korean-American community can take part in the discussion of the close link between the Korean identity and the Korean reunification. To resolve the identity issues of Korean-Americans the Council will make a special effort to bring the older generation of Koreans and the younger generation of Korean-Americans to create fresh new approaches to reconciliation and reunification of South and North Korea. The goal of ICKS in the year 2000 is to increase its membership to 300 by recruiting the younger generation of Korean-Americans and provide them the opportunity to work out their identity problems by actively participating in the seminars and discussions related to Korean affairs including the reunification of the two Koreas. We invite all the 1.5 and the second generation of Korean-Americans to take part in the activities of the ICKS. We also solicit bright new ideas from the Korean-American community for the advancement of Korean studies when we conduct academic research, publish the journals and organize the conferences and seminars. With the help of the Korean-American community the ICKS would be able to achieve the established goals in the new millennium. If you agree with the goals of ICKS we invite you and your friends to join the organization and make contributions to help achieve the goals of ICKS in the Twenty First Century. The Board of Directors is chaired by Dr. Ungsoo Kim and consists of 15 distinguished scholars in professional and academic fields. The Board of Directors elects the President and Vice Presidents for a four-year term and Dr. Ilpyong J. Kim serves as the President and Dr. Whee Gook Kim as the Executive Vice President, Dr. Hang Yul Rhee and Dr. Eui Hang Shin as Vice Presidents. (1996)

March 27, 1996

Dear Colleagues and Friends:

This letter is to extend our cordial invitation for you to join the International Council on Korean Studies (ICKS) which was organized in New York on March 16, 1996 and incorporated in Washington, D. C. The ICKS is a non-profit and non-partial organization dedicated to the advancement of Korean studies and related academic and professional research in the field of Korean affairs in the United States as well as abroad through international conferences and publications, and other relevant activities. The Council aims to promote aerial consciousness of the significance of Korean affairs and the issues of the Korean reunification among the professionals and the public alike. You, as a member of ICKS, will receive the newsletter of the Council and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Studies (IJKS) four times a year and participate in the seminars and conferences of the Council from time to time. We are planning to organize the first academic conference in the middle of November 1996 on the theme of ‘Two Koreas in the World Affairs’. I hope you would be able to make some suggestions and contribute new ideas for a successful conference. For your information I am enclosing with this letter a brochure regarding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Korean Studies and your membership application forms. I look forward to hearing from you soon.

Sincerely yours,

Ilpyong Kim

President

존경하는 (            ) 귀하

그동안 염려해 주시고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신 덕분에 국제한국학회의 학술회의는 성공적으로 끝마쳤습니다.

미국정부의 한국분야 전문가와 재미동포학자들과 그리고 귀 연구소에서 보내주신 연구원들 모두 30여명이 훌륭한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에 참여해 매우 진지하고 뜻 깊은 토론이 됐습니다. 그리고 학술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110여명이나 됐습니다.

미국정부에서 25년간 복무한 퇴역장군 한 분은 지난 24년 동안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한국관계 학술회의에는 모두 참석해 보았는데 이번 국제한국학회가 개최한 학술회의는 학술논문의 발표와 토론 면에 있어서 매우 우수한 수준을 유지했으며 조직과 진행 면에 있어서도 최고의 수준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가 평가하기에는 이번 학술회의는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최고의 학술회의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공적으로 최고의 학술회의를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귀 연구소에서 우수한 학자를 선발해 보내주시고 또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신 덕택이라고 생각하며 깊이 감사해 마지않습니다. 국제한국학회의 발전을 위해 계속 염려해 주시고 후원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며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해 드리는 바입니다.

1996년 11월 21일 국제한국학회 회장 김일평 교수 드림

<계속>

회고록 (52)〈한민족포럼〉발행과 그 공헌자 안충성 박사의 기억들

뉴욕의 한인사회가 많이 성장해 2000년대에는 한민족의 미래를 생각하고 또 한민족의 미국이민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 위한 여러 학술회의와 연구단체들이 생겨났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나는 하와이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에서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연구위원(Research Associate)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강원도 횡성 출신인 안충성 씨를 만났다.

앞에서 술회한 그대로, 그는 한국에서는 해양대학을 졸업한 뒤 해군 복무를 마치고 하와이대(University of Hawaii)에 유학을 왔다. 자기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는 해양과학(Marine Science)이기 때문에 하와이로 유학을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만나서 동서문화센터 식당에서 식사를 함께 하면서 조국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며 매우 가까이 지냈다. 그 뒤 안충성 씨는 보스턴의 MIT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가서 현대그룹에서 근무 했다. 내가 코네티컷주립대(University of Connecticut)로 옮겨온 후 뉴욕의 안충성 박사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가 현대에 입사한 후 겪었던 모종의 사건이 계기였다(회고록 51회 참조).

‘개천에서 용이 난다’라는 한국 속담

10년 전인 1998년 9월에 한민족포럼이 주도해서 하남 안충성 박사의 자전적 에세이집 『보이는 곳까지 뛰어라 그러면 또 보인다』의 출판기념회를 뉴욕 아스토리아 월드 메이너에서 개최한 것이 아직도 내 기억에는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는 비즈니스를 하면서도 한민족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해외 ‘한민족포럼’을 조직하고 운영하기 시작했다. 나는 안 박사가 개최하는 해외 한민족 회의에 조직위원장으로 적극 참여 했으며 <한민족 포럼>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도왔다. 안 박사가 자전적 수필을 써서 출판기념회를 할 때 나는 서평을 써서 강연한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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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자전적 에세이를 읽고 내가 받은 느낌은 한국 속담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말 그대로였다. 이미 앞에서 언급하기도 했지만, 좀더 그에 관한 기억을 살려 보기로 한다. 안 박사는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현천리라는 시골에서 태어나고 국립인 한국해양대를 졸업한 후 미국 명문대인 MIT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 조선공학 분야 박사학위를 받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이후 그는 미국의 여러 기업에서 근무하다가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에게 발탁돼 현대상선 사장에 임명돼 조국에 봉사할 수 있었다.

현대그룹에서 근무할 때 ‘닥터 안’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역시 미국의 명문대학인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던 이력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의 꼼꼼한 성품과도 관련된다. 안 박사는 모든 일을 꼼꼼하게 잘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수준도 매우 높아 비범했다. 현대그룹의 성장을 도운 인물 가운데 손꼽을 수 있는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현대에서 닥터 안과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 중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말에 따르면 닥터 안의 치밀하고 섬세한 통찰력,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누구도 따라 갈 수 없었다고 한다. 닥터 안은 참으로 타고난 재주와 총명한 지능의 소유자였다.

내가 하와이대 캠퍼스에서 닥터 안을 처음 만난 1963년 당시 안 박사는 하와이대 해양과학과에서 석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 거의 반세기 전의 일이다. 그 당시 안 박사는 20대 젊은 청년으로 혈기가 왕성했다. 나는 1950년대에 미국에 유학 와서 뉴욕의 콜럼비아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 과정을 끝내고 하와이대에 새로 생긴 동서문화센터의 부설 연구소(Institute of Advanced Project at East-West Center)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연구를 시작한 때였다. 어쩌면 우리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삶의 궤도에 있었지만, 젊은 혈기와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머나먼 타향에서 학업에 전념한 것은 같은 이유에서였을지도 모른다.

안 박사는 석사학위를 마치고 곧 MIT에 새로 생긴 해양공학과에서 장학금 (Full Scholarship) 을 받고 박사학위를 하게 됐다. 무엇보다 그는 한반도의 동쪽에는 동해, 서쪽에는 황해, 남쪽에는 태평양 삼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양공학을 연구해서 한국의 미래발전에 공헌하겠다는 애국심에 불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강원도 산간 출신인 그가 생소한 해양공학을 전공하는 동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해양분야의 선두주자로 외길로만 뛰어 성공했으며 아직도 해양공학 분야의 연구와 실무에 종사하고 있다.

‘닥터 안’의 물려받은 혈통과 열정

안 박사의 선친은 일본 제국주의 통치시대에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부친의 전통을 이어받은 닥터 안의 애국심은 매우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애국심과 열정은 그 자신을 미국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비즈니스맨으로 만든 동시에 한국의 문화를 미국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모든 힘을 쏟게 만들었다. 일찍 한민족 포럼 재단을 설치하고 격 월간지 <한민족 포럼>을 발행하며 우리 한인 1.5세들과 2세들의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 놓은 것도 그런 열정의 소산이었다. 또 한민족 포럼이 더욱 발전해 재미동포에게도 한국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그들의 교양을 증진 시킬 수 있게 한 것도 안 박사의 분명한 업적이다.

한민족 포럼이 주최하는 한민족 학술회의는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해외 한민족의 긍지를 북돋는 동시에 그들의 자녀들이 한국문화를 좀 더 잘 이해하고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지닐 수 있게 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한민족 포럼이 주최하는 국제학술회의는 한국의 전문가, 해외 각처에 살고 있는 지식인과 문화인 등을 초대해 상호간의 학술교류를 통해 해외한민족이 한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한민족포럼은 또 차세대의 한글 교육과 한국문화 교육을 어떻게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그 방향을 설정하는 학술회의도 개최하고 있다. 안 박사는 차세대 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국인 이민자들의 2세와 3세들이 미국사회에서 자라면서 미국교육을 받고 있으며 미국문화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한국문화 교육과 그들의 한국 역사관을 바로 잡아주기 위한 ‘차세대 교육 프로그램’도 한민족 포럼의 과제라고 생각한 그는 다양한 해결방법을 찾고 있었다.

우리 한민족은 미국속의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또 우리 후세들에게 이중문화를 보급하면서 한국문화의 우월성을 인식시키는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 안 박사의 비전이 꿈이 아니라 현실로 실현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고희를 앞둔 안 박사는 다음 10년을 어떻게 하면 우리 한국문화를 미국사람과 다른 민족에 보급하고 우리 문화의 우수함을 해외 한민족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알린 것인가 하는 과제에 모든 힘을 다하고 있다. 그런 그를 우리는 곁에서 도와주며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뉴욕의 유일한 한민족 포럼을 창립하고 우리 한민족의 우수성과 미래 지향적인 문화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모색하면서 묵묵히 자신의 삶을 헌신해온 안 박사의 지난 공헌에 다시한번 깊이 감사드린다.

<계속>

회고록 (51) 해외 한민족 위한 ‘민족대학설립’ 구상했으나 결실 맺지 못해

나는 1987년부터 해외 한민족에 대한 관심을 갖고 해외한민족 현황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76~1977년에 풀브라이트 교환교수 장학금으로 도쿄대에서 1년동안 연구하면서, 또 국제기독교대학에서 국제정치학 강의를 하면서 재외동포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게 구체화된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현지의 韓人과 일본인들로부터 자주 들어왔던 ‘재일동포의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작용했다. 일본에는 60만의 한민족이 동등한 대우도 받지 못하고 외국인으로서 살면서 자녀교육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우수한 재일교포의 자녀가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일본의 도쿄대나 일류 대학을 졸업해도 일본학생이 받는 것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차별을 받는다는 사실을 나는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전세계에 ‘디아스포라’로 있는 해외한민족 문제에 대해 나는 미국대학의 교수직에서 은퇴한 후 연구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우선 해외 한민족의 역사부터 연구하고 해외한민족의 미래에 대한 연구는 국제문제의 일환으로 다루기로 구상해 보았다. 그리하여 뉴욕에서 사업을 하는 안충성 박사와 상의했다. 안충성 박사는 내가 1965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에서 연구교수(Research Associate)로 근무할 때 만난 인물로, 이후 보스톤의 MIT로 전학해 해양과학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민족포럼과 MIT 안충성 박사와의 만남

안 박사는 한국해양대를 졸업한 후 現代 그룹에서 오랫동안 근무했기 때문에 한국의 실정에도 매우 밝은 사람이었다. 우선 ‘한민족 포럼’이라는 회합을 시작하고 학술회의에서 발표되는 논문은 ‘한민족 포럼’이 간행하는 잡지에 게재해 발행하기로 했다. 나는 <월간 한민족>의 창간호에 ‘한민족재단 공동의장’으로서 「뉴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는 세계속의 한민족」이라는 ‘신년 권두사’를 썼다. 십수년이 지난 오늘 다시 읽어 보아도 나는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나는 최근 한국에서 실시된 여론조사를 보고 놀랐다. ‘통일문제 전문가의 77.7%가 2020년 이내에 한반도가 통일된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월간 한민족>에 발표한 당시 글의 일부를 보자. “그것은 세계화의 추세로 나아간다면 국가와 국가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는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되기 때문이다. 아직 2020년이 되기에는 10년이나 더 남아있다. 그러나 중동지역에서 볼 수 있는 민족주의의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과연 2020년대에 민족국가는 해체되고 하나의 평등한 세계연합이 전개 될 것인지는 미지수다. 21세기에는 국가는 통합되고 무너져서 하나의 세계공동체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21세기는 통합의 세기이기 때문에 한반도의 휴전선도 무너지고, 남북의 분단도 통일의 시대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정세 변화를 예측한 바 있다. 그러나 안 박사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서 전혀 다른 해양사업에 종사함으로써 뉴욕의 ‘한민족 포럼’은 중단됐고, 뉴욕 후러싱의 ‘한민족연구소’도 문을 닫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남 안충성 박사는 강원도 횡성의 두메산골에서 출생해, 많은 고생 끝에 미국의 명문대학 MIT에서 해양공학 박사학위( Ph. D.)를 받았다. 해양공학 분야에서는 한국의 권위자로 한국인의 긍지를 지켰다. 그는 現代에 재직하면서 우리나라의 산업발전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의 대통령 출마를 도우면서 부산 초원복집 사건에 연류돼 해양공학의 열정과 경험, 그리고 학문을 한국에서 다 펴지 못하고 뉴욕에 와서 새로운 변신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조국을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어머님을 위해 무엇인가 보람 있는 일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원대했던 민족대학 설립 구상

그는 한민족의 인재육성 사업, 특히 21세기를 대비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정보기술 분야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그는 성공한 한인 비즈니스맨으로서 뉴욕 상공회의소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550만 해외 한민족을 위해-민족정론지 <월간 한민족>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한민족재단 이사장으로 미주한인동포와 지구촌 한민족 사회 발전을 위한 각별한 기여를 하기로 약속하고 주어진 미국의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의 후배였다.

김일평 교수 등이 구상하던 민족대학 설립을 보도한  1997년 9월 4일자 기사.

김일평 교수 등이 구상하던 민족대학 설립을 보도한 <조선일보> 1997년 9월 4일자 기사.

그의 자전적 에세이 『보이는 곳까지 뛰어라 그러면 또 보인다』를 한민족포럼에서 출판한 바 있다. 안하남 박사, 시카고의 김원삼 목사와 나를 포함해 우리 세 사람은 함께 힘을 모아서 세계 한민족의 역사연구와 미래에 대처할 구상도 해 보았다. 바로 이 구상이 ‘민족대학’을 뉴욕에 설립하는 것이었다. 위의 사진은 안하남 박사와 시카고의 김원삼 목사와 함께 민족대학의 설립을 구상할 때 조선일보의 우태영 기자가 쓴 당시 기사의 일부다. 20여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내 기억에는 생생하게 남아있다. 당시 우리가 구상하고 있던 ‘민족대학 설립 취지서’를 덧붙여둔다.

民族大學 설립 취지서

미주대륙에는 벌써 150만 명이 넘는 우리 韓民族이 이주하여 살고 있습니다. 韓民族의 이민역사도 10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미주대륙에는 우리 민족의 얼을 심어주고 민족문화를 가르쳐 줄 수 있는 民族大學이 없다는 것은 우리 韓民族의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21세기를 대비하여 민족대학의 설립을 절실하게 요청받고 있습니다. 세계각지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우리 韓民族은 500만이 넘었으며, 우리 민족의 문화를 계승하고 보존하며 세계문화를 창조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韓民族은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있으며 미주대륙에도 우리민족의 문화를 가르치고 또 전세계에 확산시킬 수 있는 교육사업이 절대로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韓民族은 우리의 민족문화와 서양문명을 융합하고 세계문화를 창조하는데 공헌할 수 있는 民族大學이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21세기의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韓民族은 21세기에 대비해 새로운 세계문화를 창조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민족대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民族大學은 미주대륙에 정착한 한민족의 후세와 한국의 신세대를 교육시킬 수 있는 교육기관으로서 비영리적인 교육사업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곳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제2세대 동포와 미주대륙에 산재하여 살고 있는 韓民族에게 민족의 얼을 심어주고 민족문화를 가르쳐 그들이 세계문화 창조에 이바지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고 선구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미주대륙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韓民族은 직장생활에 분주하고 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많은 희생을 했습니다. 民族大學은 그들의 경험을 평가하고 국내에서 받은 교육도 참조하는 동시에 새로운 교육과정을 개발하여 학사(B.A.), 석사(M.A.), 박사 (Ph. D.)학위를 받을 수 있는 평생교육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입니다.

民族大學의 교육방법은 전통적인 교육제도와 방법을 초월하여 새로운 교육방법인 통신교육, 전자매체교육, 장거리교육(Distance Learning)등 새로운 교육기법을 사용하고, 첨단교육기술을 개발하는 동시에 세계적 추세인 교육개혁에도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서울의 YMCA가 최근 수도권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차기 대통령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로 교육문제 해결과 부정부패 척결을 상대적으로 높게 꼽았습니다, 한국에서는 매년 2조원(미화 22억 달러) 이상의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것이 교육문제로 부상되었습니다. 21세기를 대비하여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교육개혁이 불가피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의 교육개혁은 조기유학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며, 한국에서 오는 조기유학생과 연수생을 위하여 민족대학은 어학교육은 물론 새로운 교육과제도 개발하여 유학생들의 모든 편의를 도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유학생과 연수생을 위한 교육도 민족대학이 담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민족대학의 설립을 위하여 교육문화재단을 조직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비영리재단으로 등록하면 민족교육에 헌금하는 금액은 세금의 면세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거액을 희사하는 사람은 재단이사로 영입하여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고, 또 대학부지와 시설을 확충할 때 헌금하는 유지와 명사들에게는 그들의 명예를 길이 보존하기 위해 그들의 성명을 따서 기념관을 설립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입니다.

미주대륙에 이주하여 사업에 전념하는 바람에 고등교육의 기회를 놓친 실업가에게는 명예박사학위를 수영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실업가뿐만 아니라 종교계, 의학계, 문화예술계, 사회사업가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며 많은 공헌을 하고 한국을 빛낸 韓人실업인에게는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는 제도를 민족대학은 설정할 것입니다. 민족대학의 등록명칭은 한민족국제대학(韓民族國際大學, International University of Overseas Koreans) 또는 東西大學 (Eastwestern University), 또는 세종문화대학 등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997년 내에 민족대학 설립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민족대학설립재단을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민족대학의 개교식은 1999년 9월에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1997년 7월 17

民族大學설립준비위원회 위원장 김일평 박사

민족대학 설립교육재단 이사장 김원삼 목사

그러나 안충성 박사는 새로운 해양사업을 개척하기 위해 동남아시아의 싱가포르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결국 민족대학의 설립은 실현되지 못했다.

<계속>

회고록 (50) 기억 속의 그 날들 … 한인회 창립과 한인이민사 집필 무렵

앞서의 글과 마찬가지로 이 글들 역시 김일평 교수가 외부의 청탁을 받아 집필했던 원고의 일부들이다. 회고록 전체의 구성과 전개상 필요한 부분을 게재한다.

나와 뉴욕 한인교회

나는 1957년 9월부터 뉴욕의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뉴욕에는 그해 6월부터 와서 여름방학을 이용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좀 벌어보기로 했다. 그 당시 여름방학이 되면 뉴잉글랜드 지역과 다른 지방에서 많은 유학생이 뉴욕에 모여들고 여름방학 동안 일자리(summer job)를 구해서 3개월 동안 학비와 용돈을 버는 것이다. 나는 콜럼비아대 부근 112번가에 숙소를 정하고 은행에서 3개월 동안 밤일을 했다.

뉴욕의 콜럼비아대 캠퍼스 부근 633 West 115 Street 에는 뉴욕한인교회(Korean Church and Institute) 4층 건물이 있었다. 주일에는 아침 11시에 윤응팔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한 후 교회건물 지하에 내려가서 점심식사를 함께 나누는 친교시간이 있었다. 윤응팔 목사와 그의 사모는 우리 유학생이 한국음식을 맛 볼 수 있게 국수를 삶고 김치도 만들어 주었다. 반세기 전인 1950년대의 뉴욕사회는 40~50명의 유학생이 주류를 이루었고 뉴욕에 정착해 살고 있는 한인은 20~30여명에 불과했다. 그런 환경 탓에 뉴욕에는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제대로 있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한국인이면 누구나 선호하는 김치는 케베이지(감란)로 만들어 먹었던 것이다. 국수도 미국식 스파게티 국수를 삶아서 치킨수프에 넣어서 먹었다.

뉴욕의 한인들은 조국에서 일어나는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 분야에 대한 뉴스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뉴욕타임스>가 한국의 뉴스를 종종 보도하긴 했으나, 매일 일어나는 뉴스는 알 수 없었다. 콜럼비아대의 동아시아 도서관에는 한국에서 보내오는 신문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배로 보내오기 때문에 한 달이 지난 후에야 받아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도착하는 신문기사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1960년 4월 19일 서울에서 학생 데모가 일어난 후에는 미국의 3대 방송매체와 <뉴욕타임스>는 매우 생생한 뉴스를 서울발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우리 한인 학생들은 뉴욕한인교회에 모여서 조국에서 진행되는 학생데모에 동조하는 의미에서 한국영사관 앞에서 데모를 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 당시 뉴욕지역 한국학생회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뉴욕한인교회에서 모이는 집회의 사회를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희생된 한국학생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검은 완장을 팔에 두르고 희생된 그들을 추모하는 데모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뉴욕한인교회는 주일에 예배드리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유학생이 자주 모여서 한국문제를 토론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또 뉴욕의 한인들이 한인교회에 모여서 뉴욕한인회를 조직하고 실행위원회를 소집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미국의 중부 혹은 남부에 와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은 여름에 뉴욕을 방문할 때는 반드시 콜럼비아대 캠퍼스와 뉴욕한인교회를 방문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관례였다. 그것은 뉴욕을 방문하는 한국인은 뉴욕한인교회를 방문해야 한국인을 만나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욕한인교회는 한국학생들의 대화의 광장이었으며, 학생집회를 소집해 민주주의를 배우고 시민사회를 경험하는 광장이기도 했다.

뉴욕 한인회 창립 50주년 기념 강연내용(2010. 6.12.)

뉴욕에는 어느덧 30만이 넘는 한민족이 살고 있다. 뉴욕의 삼각주라고 말하는 뉴욕주, 코네티컷주, 그리고 뉴저지주를 합하면 50만 이상의 한민족이 살고 있다. 뉴욕한인회는 1960년 4월에 창립됐으니 2010년 4월은 뉴욕한인회 창립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따라서 뉴욕의 한인사회가 발전하는 반세기를 회고해보는 것도 뜻 깊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때마침 내가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M.A., Ph.D.)를 공부할 때 뉴욕한인회가 조직됐다. 나는 뉴욕지방 한인학생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한인회 조직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것은 한국 유학생들이 뉴욕한인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뉴욕의 원로 한인들의 부탁과 염원 때문이었다.

다음의 공로패는 뉴욕한인회가 창립 50주년(1960~2010)을 맞이해 지난 반세기동안 내가 뉴욕의 한인사회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전체 한인사회에 공헌한 의미를 기여 수여한 공로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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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이민 100주년 역사를 편집하다

2003년은 우리역사의 매우 뜻 깊은 해다. 한인의 미국이민 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또 한국전쟁이 끝나고 휴전협정을 체결한지 50년이 되는 해다. 한·미간의 방위동맹을 맺은 지도 50년이 지났다. 개인적으로도 내가 미국에 와서 유학생활을 시작한지 반세기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니 2003년은 우리의 민족적으로나 나 자신의 개인적 입장으로나 매우 뜻 깊은 해이다. 지난 반세기를 회고하면서 우리 한민족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면서 뉴욕 한인회의 이민 100주년 기념 사업회의 미국이민 100년 역사편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서 역사책을 편찬했다. 그리고 나의 미국유학 50년사를 포함하는 회고록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나는 미국에서 모두 35년간의 교수생활을 마감하고 1997년에 교수직에서 은퇴했다.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2년간 연구경력을 합하면 35년간의 교직생활을 한 셈이다. 그동안 7년마다 보장된 안식년은 도쿄대 방문교수(1976~1977)와 한국의 한양대 대학원장(1978~1980)시절, 그리고 서울대 외교학과 방문교수(1997~1998)로 지냈다. 미국의 풀브라이트 연구기금으로 우리 가족과 함께 보낸 것이다. 코네티컷 주의 은퇴보상금은 최종 급료의 70%로, 내가 숨이 다할 때까지 지급된다. 물론 의료보험도 다 포함돼 있기 때문에 매년 건강진단과 의약품도 포함돼 있다. 따라서 코네티컷 주의 교육공무원은 미국의 다른 어떤 주립대학보다 매우 좋은 조건으로 대우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교수직에서 은퇴한 후 1996년에 워싱턴의 김휘국 박사와 함께 국제한국학회(ICKS)를 창립하고, 한반도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국제정세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물론 한국인의 미국이민 역사와 세계 속의 한민족의 역사자료를 수집하고 출판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한민족의 해외 활동역사도 여러 권 편찬한 바 있다.

2003년은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이 되는 해다.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을 맞이해 초기이민 노무자, 독립운동에 몸바친 애국선열들의 역사를 기록해 놓기 위해 나는 ‘대뉴욕 한인 100년사 편찬위원장’의 중책을 맡았다. 조병창 대뉴욕한인회장이 발행사를 쓰고, 내가 편찬사를 썼다. 그리고 100주년 미 대통령 선언문과 미 상원 서언문도 포함했다. 축사는 김기철 한인회장, 조지 파타키 뉴욕 주지사, 매그리비 뉴저지 주지사, 그리고 롤랜드 코네티컷 주지사가 기고했다. 메트로폴리탄 뉴욕을 배경으로 살아온 한인들의 역사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4*6 배판으로 5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다. 이 책의 뒷면에는 편집위원장: 김일평 박사·코네티컷 주립대 명예교수, 부위원장: 서진형 IMS 회장·한인이민 100주년 대 뉴욕 기념사업회 공동후원회장, 그리고 편집위원: 하동수 전 뉴욕한인회 사무총장·전 미주한인총연 사무총장, 조종무 라디오코리아-KTV 보도본부장, 화미광 문학박사·전 퀸즈칼리지 교수, 송의용 언론인 등 편찬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나는 편찬사로 「후세들에게 남길 역사의 교훈」을 수록했다.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대뉴욕 기념사업회는 2002년 11월 『대뉴욕 한인 100년사』의 출판을 결정, 나를 편찬위원장에 위촉하고 또 서진형 IMS Systems 회장을 부위원장에 임명했으며 또 송의용 언론인을 간사로 뽑아 편집 및 출판사업을 시작했다. 그동안 28명의 집필진에게 각 분야별 집필을 청탁했으며 1년 이상의 집필 및 편집과정을 거치게 됐다.

『대뉴욕 한인 100년사』를 편찬하는 목적은 우리 이민 선조들이 지난 100년 동안 (1903~2003) 미국 땅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떤 생활을 했으며 미국사회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 기록을 남기는 것이었다. 대뉴욕 지역에 정착한 한인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우리 후세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후세들이 선조들의 경험을 거울삼아 좀 더 바람직하고, 더 훌륭한 생활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하였던 일이다.

편집윈원회는 다음과 같은 집필지침을 세웠다. (1) 원고작성은 기본적인 역사 자료나 구술 역사(Oral History) 자료를 바탕으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집필한다. (2) 편파적이고 주관적인 원고는 출판할 수 없다. (3) 100년 역사의 원고 수준은 학술적인 논문 형식이 아니라 일반 대중의 독자를 위해 알기 쉽게 쓰는 것을 강조한다. (4) 자료의 출처는 반드시 밝혀서 표절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한다.

이렇게 해서 『대뉴욕 한인 100년사』 집필이 시작됐다. 집필진의 절반은 학자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언론인이 썼기 때문에 균형이 잘 잡히지 못한 분야도 있었다. 그러나 편집과정에서 원고검토를 거치고 수정, 보완도 했기 때문에 큰 오류는 피할 수 있었다. 『대뉴욕 한인 100년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집필자의 사정으로 원고청탁을 받고도 집필하지 못한 분야, 또 원고를 쓰겠다고 약속해 놓고 원고 마감까지 제출하지 않은 경우는 빠지게 됐다는 사실을 편집위원회는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 한인들의 자화상이며 빠진 분야가 있다면 그 부분은 다음 기회에 보완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27374_13807_2428이 책의 집필과 출판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조해 준 한인 이민 100주년 대뉴욕 기념사업회 조병태 회장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본문 옆의 사진 속 두 권의 책은 왼쪽이 『대뉴욕 한인 100년사』의 표지이며, 오른쪽의『Korean-Americans: Past, Present, and Future (재미 한국인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주로 한국인 젊은 1.5세 혹은 2세들이 미국의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할 때 재미한인 (Korean-Americans)에 관한 논문 중 일부를 발췌해 이 책에 기고한 것이다. 미국의 도서관협회의 기관지인 <초이스(Choice)>지에 매우 좋은 서평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의 각 대학 도서관은 물론 공립도서관에서 구입했다. 영문으로 된 서평을 여기에 함께 실었다.

CHOICE April 2005

Korean-Americans: Past, Present, and Future, ed. Ilpyong Kim. Hollym,2004. 299p.bibl. ISBN 1565911210 pbk, $24.50. Also (100 Year History of Korean Immigration to the United States)

Korean immigration to Hawai’i began in 1903, and starting in 2003, Korean Americans celebrated the centennial of their history in the US. As part of that commemoration, this anthology explores key facets of the Korean American experience. Editor Kim (Professor of Political Science, University of Connecticut) succinctly reviews the history of Koreans in the US, while Han-Kyo Kim discusses the competing views of the leaders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US. Following their lead, Yong-Ho Choe and Yoon Joh trace the prominent role of churches in the Korean community. Politics, business, and adoption are also examined. Angie Chung analyzes generational politics, even as Sean Oh laments the absence of Korean American visibility in national and state politics. Eunju Lee and Miliann Kang emphasize the importance of women’s work to family incomes and small businesses. Focusing on Korean adoptees, Eleana Kim and Richard Lee examine the identity issues facing this group. The voices of Korean American Youth are also aired in four essays. Overall, this is a convenient and useful introduction to the Korean American experience. Summing Up: Recommended. Suitable for general as well as academic audiences, all levels.

-F. Ng, California State University, Fresno, California.

<계속>

회고록 (49) 뉴욕 한인회 반세기 회고와 50년 미래의 비전

이번 차례에서 소개할 두 개의 글은 뉴욕한인회 회장의 청탁을 받고 집필한 글이다. 먼저 ‘뉴욕한인회 지난 반세기 회고와 50년 미래의 비전’ 부분(이 부분은 필자가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회고록의 전체 구성을 위해 그대로 싣는다. 시점은 당시 이 글을 발표할 무렵의 시점이다. 편집자주)을 먼저 소개한다.

뉴욕한인회는 2010년 11일 맨해튼 뉴욕한인회관 강당에서 ‘창립 5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개최했다. 지난 50년을 돌아보고, 다음 50년을 설계하는 매우 뜻 깊은 행사였다. 필자는 1950년대 콜럼비아대 대학원의 대학원 학생으로 있을 때 ‘뉴욕지역 한인 학생회장’에 당선된 일이 있었다. 나는 한국학생회 회장으로서 1960년 뉴욕한인회가 창립될 때 집행위원회 (현 이사회) 일원으로 참여한 바 있다.

때문에 나는 뉴욕한인회의 지난 50년을 돌이켜 보며 다음 50년을 설계하는 미래지향적인 한인회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뉴욕한인회의 집행부의 헌신적인 노력과 이사진 그리고 자문위원들의 노고로 50주년 행사는 성공적이었다. 우리는 지난 50년을 돌이켜 보며 고칠 것은 고치고 미래지향적인 사고방식으로 다음 50년을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뉴욕한인회는 전환기에 처해 있다. 구시대의 사고방식은 버리고 참신하고 또 창조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사고방식으로 현실에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이번 한인회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뉴욕한인회는 전환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제 31대 하용화 회장단은 과거의 조직과 편성과는 매우 다르게 참신하고 유능한 새로운 회장단과 집행위원회를 조직했다.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대학원 혹은 전문 대학원을 졸업한 1.5세와 2세들이 많이 등용됐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그들은 이민 1세대와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있었다. 나는 이번 뉴욕한인회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았으며 뉴욕한인회의 젊은 부회장단 그리고 임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지난 달 부터 이번 행사에 대한 연락을 전자우편 (이메일)으로 주고받으면서 여러 의견도 교환할 수 있었다. 또 전화통화에서도 느낀 나의 판단은 한인회의 젊은 2세 간부들은 우리 한인사회의 미래지도자라는 것을 직감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민 1세대와는 확실히 달랐다. 또 그래야만 한인사회도 변하고 한인회가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50년 전 뉴욕한인회가 창립되고 초대 회장단부터 제5대 회장단에 이르기까지 한인회 회장단의 대부분은 그 시대의 소산물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네포티슴(연고주의)이 팽배했으며, 매우 비합리적으로 한인회 집행부를 운영하기도 했다. 출신지방과 연고주의 혹은 중고등학교 동창과 친지를 우선해 간부에 등용하는가 하면, 친지 혹은 연고가 없는 교포들은 소외당하는 것이 뉴욕한인회 조직의 특성이었다. 그러나 1965년 미국이민법이 개정되면서 동양인들의 이민 쿼터제가 없어지고 동아시아계를 증폭하는 새로운 이민법이 등장했다. 따라서 1970년대에는 한국인 동포가 수십배로 증가했다.

미국 한인사회가 성장하고 구성원도 바뀌었으며 또 한인동포의 교육수준도 점차 높아졌다. 한인동포 사회의 1.5세와 2세들은 유럽 혹은 다른 지방의 이민사회와는 달리 매우 열심히 일하고 사회봉사에도 적극 참여함으로써 미국 이민사회의 모델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한인사회를 50년 전의 한인사회와 비교할 때 얼마나 많은 발전을 이뤘는지 측정하기 힘들 정도다.

우리 한인사회의 1.5세와 2세들은 전문직에 많이 진출하고 있으며 또 교육계와 실업계에 진출함으로써 한인들의 영향력도 각계각층에서 증가하기 시작했다. 뉴욕한인회의 회장단과 집행부의 요원으로 일하고 있는 젊은 세대 중에는 전문분야에 종사하는 우리동포 1.5세대와 2세들이 대분분이다. 그와 같이 많은 신세대가 뉴욕한인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나는 이번에 처음 보았다.

오늘의 한인회를 50년 전의 한인회와 비교할 때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1950년대의 우리세대와 비교해 볼 때, 21세기의 신세대 사람들은 영어를 미국사람과 똑같이 유창하게 구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식수준과 상식에서도 미국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과 의사소통도 잘된다. 그리고 모든 행사를 계획하고 실무적으로 집행 할 때 그들은 미국사람과 똑같이 매우 합리적으로 모든 업무를 잘 처리 한다. 나는 50년 전 뉴욕한인회 창립멤버와 오늘의 한인회 구성멤버는 양적으로 혹은 질적으로 매우 다르다고 판단한다. 구세대의 문제점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파벌주의와 연고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 또 말은 많이 하는데 실천하는 행동이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 50년의 한인사회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뉴욕 한인사회의 미래상을 한번 예측해 볼 수 있다. 뉴욕한인회가 21세기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려면 혈통주의와 지역연고주의를 초월해 좀 더 합리적이고 기능주의적이며 전문성을 존중하는 한인사회로 변해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난 50년 동안 참여했던 한인사회는 새로운 형태의 한인사회로 변해 갈 것이며, 뉴욕한인회도 오늘의 한인회가 아니라 21세기에 걸맞은 한인회로 변하지 않으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전통을 이어받은 우리 한인 2세와 3세들은 그들의 조상을 존중하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한인회가 해체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부모님과 선배들이 불러 일으킨 한국인의 정신과 문화전통을 이어받아 뉴욕한인회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의 형태와 기능은 매우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고 조직돼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한인 1세대는 뉴욕한인회가 해체돼 없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후손들이 계속 유지하고 또 친목회를 초월하는 한미단체로 육성하는 것이 미래 한인사회의 비전이며 희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계속>

회고록 (48) 미국 移民史에 대한 관심 … 나는 왜 역사를 배우려 했나?

나는 한국을 떠날 때 고등학교 은사님으로부터 미국유학 선물로 역사책 3권을 받았다. 부산에서 미국의 시애틀 까지 2주일 동안 배를 타고 항해하는 동안 나는 『조선역사 개설』 (서울대출판부)와 『도산 안창호』(도산기념사업회) 그리고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를 전부 읽었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는 한국인의 미국 이민 역사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 했다. 한국인의 미국 이민사에도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미국에 이민 온 역사는 한말 고종시대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노동인력을 보낸 1903년부터 그 시초를 찾아 볼 수 있다.

2003년은 한국인이 미국에 이민하기 시작한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서부의 캘리포니아 주를 비롯해 동부의 뉴욕과 보스턴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에서는 미국에 거주하는 100만 명의 한인 이민 100년사를 편집하기 시작했다. 나는 뉴욕의 ‘뉴욕 이민 100년사’의 편집위원장의 중책을 맡고 『대뉴욕 한인 100년사』를 한국어로 편집해 출판했다. 그리고 『Korean-Americans: Past, Present and Future』의 영문책을 편집해서 출판하기도 했다.

한국말로 된 100년사는 출판위원회가 한국의 출판사에 보내서 출판했다. 제본을 잘못해 책 크기(사이즈)가 화보와 같은 크기의 책으로 500쪽이 넘었기 때문에 도서관의 서가에 꽂을 수도 없고, 또 개인 집이나 아파트의 책장에 꽂아 놓을 수 없는 전형적인 화보 책이 되고 말았던 책이었다. 많은 한인들의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무엇 때문에 500페이지가 넘는 『대뉴욕 한인 100년사』를 화보판으로 제본해 하나의 ‘장식품’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했다(아래 두 권 참조).

한국인의 미국 이민사를 정리한 국문판, 영문판 이민사. 이 두 책의 운명은 판이하게 달랐다.

한국인의 미국 이민사를 정리한 국문판, 영문판 이민사. 이 두 책의 운명은 판이하게 달랐다.

그러나 영문판으로 출판된 책 『Korean-Americans: Past, Present and Future』라는 책은 미국의 텍스트 사이즈로 제본됐기 때문에 미국의 대학 교과서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미국에 이민한 一世들의 자녀들이 미국의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학위논문을 한국이민사에 관해 썼기 때문에 미국 각 대학의 사회학 혹은 아시안-아메리컨 (Asian-American Studies)과목의 교과서로 사용하는데 매우 적절하다고 서평을 쓴 학자도 있었다. 이 책은 집필자들이 자기의 박사학위 논문 중 한 장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기고한 원고를 바탕으로 편집한 것이다. 때문에 매우 좋은 서평을 받았으며 미국의 대학도서관뿐만 아니라 일반 도서관에서도 반드시 보유해야 할 책이라고 높이 평가됐다.

영문 책은 각 대학의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으며 한국인 이민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되고 있다. 미국이민 100년을 맞아 미국의 각 도시에 집중해 살고 있는 한국인은 각 도시의 한인 이민 100년사를 출판했다. 예를 들면 보스턴의 한인 이민사, 애틀란타의 한인 이민사, 그리고 서부의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스의 한인 이민사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한국인들이 미국유학을 시작하기 이전인 일본 식민지 시대(1910~1945)에는 미국 이민이 거의 불가능했고, 해방이 된 1945년부터 우리 한국 사람들은 미국으로 본격적으로 유학하기 시작했다. 물론 일제 시대에도 일본 패스포트(여권)를 갖고 1920년대와 30년대에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건너온 한국인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관계되는 역사공부는 많이 하지 못했다.

일본의 게이오대(慶應大)를 창립한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 같은 학자는 미국에 왔다 돌아가서 『西遊記』라는 서방 시찰에 관한 여행기를 썼다. 이 책은 일본사람들의 서양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주었으며 또 서양의 근대화 과정을 많이 공부할 수 있게끔 자극한 책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근대화 목표를 세우고 실행하는데 기반이 된 책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일본 유학생들이 유럽과 미국에 유학한 후 미국에 관해 연구한 결과도 많이 출판됐으며, 또 미국에 대한 일본 서적은 수없이 많은데 왜 한국 유학생들이 미국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서적은 별로 없단 말인가. 일본인과 한국인의 미국연구를 비교하려고 해도 한국 유학생들의 연구결과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왜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한국 유학생은 대부분 미국의 대외정책을 공부하며 미국의 외교정책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한미관계에 대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역사는 서술해 놓았지만 미국 역사에 관한 전문적인 책을 쓴 학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1950년대의 미국 유학생 중에는 미국역사 교과서를 번역해 한국에서 출판해 한국인들이 미국을 이해하는 데 공헌한 학자도 있다. 한국인 유학생은 미국 역사에 관해 전공할 필요가 없었든지 아니면 전공하기에는 너무도 벅차고 어려웠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 유학생 중에는 미국 역사 전문가는 1940년대에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미국역사는 200여년에 불과하기 때문에 공부할 재미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역사공부는 흥미가 생기고 취미가 생겨야만 파고들 수 있다고 한다. 미국 역사는 구라파의 역사에 비하면 매우 짧고 또 흥미가 없기 때문에 공부하지 않고 전공도 하지 않았다면 5천년의 한국역사는 재미가 있어서 공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1950년대의 미국 유학생과는 달리 1960년대부터는 한국에서 해외에 유학을 떠나는 유학생들에게는 한국역사도 유학시험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미국에 유학을 떠나는 학생들은 반드시 국사 시험을 치러야 했다고 우리 후세 한국 유학생들은 말한다. 한국역사 공부는 너무도 지루하고 힘들었다면서 유학시험의 암기식 공부 때문에 역사공부에서 점점 멀어지고 역사공부는 피하게 됐다고 실토하는 유학생도 있었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저명한 역사교수 E. H.카(E. H. Carr) 박사는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책을 저술해 출판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역사를 공부하고 역사의 사실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가에 대해 도움을 많이 주는 책이다. 역사공부는 과거와 현재의 다이아로그(대화)를 객관적으로 기록해 놓은 책이기 때문에 역사를 공부를 해야만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공부를 통해서 우리의 현대사를 이해하고 또 미래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회고록의 서사 시간대를 1960년대로 다시 돌아가 시간의 흐름을 다시 간추려 보겠다. 그 당시 나는 뉴욕한국학생회 회장의 임기를 무난히 끝마치고 몇 개월 동안 문을 닫아걸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콜럼비아대 대학원 박사학위 과정 예비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1963년 가을, 시험 결과 무난히 합격하고 박사학위 논문을 쓸 수 있는 자격을 받았다. 이와 함께 나는 하와이에 새로 설립된 동서문화센터의 선임연구소(Institute of Advanced Studies)의 연구위원으로 임명됐다.

그 무렵 프린스턴대의 한국학 전문가이며 정치학자인 그랜 페이지(Glenn Paige) 교수가 주축이 돼 동서문화센터에 개발도상국가의 개발행정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한국에서는 서울대 행정대학원의 박동서 교수와 스위스 대사를 역임한 이한빈 교수가 참여했고,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일본과 필리핀에서 국제문제와 개발도상국의 개발 행정을 연구하는 교수들이 참여한 세미나였다. 나는 주로 개발행정세미나의 보고를 기록하고 세미나 아젠다를 설정하는 조정관(Coordinator/Rapporteur) 역할을 담당했다. 그와 같은 학술적인 역할은 나의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나는 1964년부터 1965년까지 하와이에서 동서문화센터의 연구위원으로 월급을 받아가면서 직장생활을 했다. 내가 하와이로 떠나기 전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공부하면서 뉴욕의 한인단체에 관여한 일이 있다. 특히 뉴욕한인회를 창립할 때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이라 함은 뉴욕시뿐만 아니라 뉴저지 주와 코네티컷 주를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뉴욕주재 한국총영사관은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됐을 때부터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유학생의 여권관리와 다른 업무를 담당해 왔다. 나는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연구생활(1963~1965)을 거쳐 인디애나주립대(University of Indiana at Bloomington)(1965~1970)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대학생을 가르친 몇 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반세기동안을 메트로폴리탄 뉴욕에서 살고 있었다.

<계속>

회고록 (47) 시베리아 횡단해 소련연방으로 여행 … 역사의 교훈 생각

우리 가족이 처음 코네티컷 주에 왔을 때 우리는 먼저 교수 아파트에 짐을 풀고, 근처 집값도 알아보고, 또 어디에 위치한 집이 애련이와 금련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편리한지 알아보기 위해 집을 사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 사는 것을 미룬 데는 이유가 있었다. 블루밍턴에서 처음 집을 샀을 때 아이들이 학교에 통학하는 여건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집을 덜컥 샀기 때문에 매우 불편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인디애나를 떠날 때 우리의 집을 팔 수 없었기 때문에 1년 동안 세를 놓아야 했던 것도 한 이유다. 집 문제로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코네티컷의 집은 좀 더 신중을 기해서 20~30년 동안 살 수 있는 집을 구입하기로 했던 것이다.

우리는 교수 아파트에 입주해 있다가 3년 후에야 비로소 우리집을 새로 장만했다. 새로 구입한 집은 전통적인 콜로니얼 하우스(Colonial House)로 2층 집이었다. 아내 정현용은 집을 뜯어 고치고 또 응접실과 식당을 바꾸고, 식사를 준비하면서 밖을 잘 내다볼 수 있고 또 응접실과 뒤뜰의 아름다운 화단의 꽃을 감상 할 수 있는 경치 좋은 집으로 탈바꿈을 했다. 미국의 잡지를 보고 또 연구를 많이 해서 집 밖에서 보면 전통적인 콜로니얼 하우스 형태인데, 집에 들어와서 보면 현대식으로 꾸며놓았으며, 뒤뜰 정원을 감상할 수 있게끔 수리와 보수를 많이 했다. 누가 와서 보더라도 참으로 아름답고, 경치 좋은 집으로 변화시켜 놓은 것은 정현용 박사가 미술감상에 있어서 특유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의 두 아이들이 다닌 고등학교는 1970년대에 코네티컷주립대의 부속 고등학교(E.O. Smith High School)인 공립고등학교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었다. 이곳으로 옮겨가기 전 큰 딸 애련이와 둘째 딸 금련이는 일본에 있는 미국학교(American School in Japan)에 1년간 통학했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교수 사택이 필요했던 나는 국제기독교대학 (International Christian University-ICU)에서 국제정치학을 한 강좌 강의하기로 했다. 이렇게 강좌를 맡아주면 교수 사택을 배려하겠다는 제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국 코네티컷대 학부 강좌인 ‘국제정치학개론(Introduction to International Relations)’을 강의하기로 했다. ICU 캠퍼스는 도쿄의 중심에서 전철로 한 시간 정도 거리인 교외의 미다카에 위치해 있었다. 국제기독교대학은 가로수가 즐비하고 미국의 주립대학 캠퍼스를 연상시키는 경치가 매우 좋은 캠퍼스였다. 나는 1년간 이곳에서 초빙교수로 ‘국제정치학개론’을 강의하기로 결정하고, 아이들은 자전거로 10분 거리에 있는 미국학교에 보냈던 것이다.

도쿄의 미국학교는 미국 동부에 있는 ‘프리패러터리 스쿨’(Preparatory School)같이 미국의 일류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실력을 길러주는 고등학교이다. 일본 대사관에 나와 있는 외교관의 자녀들, 도쿄에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파견돼 있는 각종 상사직원의 자녀들, 그리고 우리와 같이 교환교수로 일본에 나와 있는 교수와 학자들의 자녀, 그리고 미국인 비즈니스맨의 자녀들 등 많은 미국사람과 외국인들의 자녀들이 초등학교 1학년에서 고등학교 3학년까지 공부하는 학교다. 사립고교이기 때문에 미국의 사립고교와 맞먹는 비싼 등록금을 내야 한다. 풀브라이트로 온 학자(Fulbright Scholar)들의 경우, 자녀들의 등록금은 일미교육위원회 (Fulbright Commission in Japan)에서 지불해 주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의 교육비는 우리가 직접 지불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즐거운 1년을 일본에서 보냈다.

애련이는 미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창작에 취미가 있었고 또 재능도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미야케라는 섬에 수학여행을 갔을 때 자기가 보고 또 경험한 것을 수필로 써서 당선되기도 했다. 애련이는 이 글로 미국에서 저명한 ‘Scholastic Award – Writing’상을 받았다고 바로 앞 회에서 서술했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부연해보자.

애련이와 사위 갬펠의 결혼 사진.

애련이와 사위 갬펠의 결혼 사진.

당시 ‘창작 분야’의 특별상을 준 편집자의 코멘트는 이렇다. “This essay is about breaking through the cultural and language barriers that separate people. In a more immediate sense it clearly recalls one of the unusual moments in life when a person gains a clear insight into herself and into the world around her.” (이 수필은 사람들을 떼어놓게 하는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관통하고 있다. 좀 더 직선적으로 말하면 이 수필은 인간이 자신과 자기 주변의 세계에 대한 투명한 통찰력을 얻게 되는 삶의 비범한 순간들의 하나를 분명하게 환기하고 있다). 즉 애련이이의 관찰력과 통찰력에 대한 과찬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재능을 갖고 있는 애련이는 웰슬리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주립대(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의 대학원 영문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는 자신의 창작력을 인정받아 대학 홍보실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었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그녀가 버클리의 가주대학 부총장 겸 개발처장(Director of Development)으로 승진한 것은 카네기재단에서 1억 달러($100 million)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신청서를 그녀가 작성했기 때문이었다.

카네기재단은 주로 사립대학에 창작 지원금을 주는데, 애련이의 신청서(Grant Proposal)가 어찌나 설득력이 있었으면 1억 달러를 주기로 결정했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었다. 애련이는 그동안 사귀던 미국친구 리처드 갬펠(Richard Gampel)과 결혼도 하고 또 장남을 낳았다. 장남 타이러스(Tyrus)는 매우 잘 자라고 있으며 벌써 초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다.

도쿄대 교환교수 생활 마칠 무렵

나는 1976~77년에 일본 도쿄대에 풀브라이트 교환 교수로 1년간 가르친 경험이 있다. 우리 부부가 1977년 미국으로 다시 돌아올 때, 우리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데리고 러시아(구소련)의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모험여행을 했다. 우리 가족은 일본 요꼬하마에서 일본상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 항에 도착해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기차를 타고 하바로프스크까지 가서 다시 항공기로 갈아타고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이 여행 코스는 여행사가 우리에게 만들어 준 여행일정이었다.

40년 전인 그 당시 일본에서 배를 타고 동해를 횡단해 블라디보스톡까지 가서 다시 소련철도를 이용해 모스크바까지 여행한다는 것은 매우 모험적인 여행이었다. 특히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다니는 애련이와 금련이가 잘 참아 준 것이 매우 기특했다. 우리는 일본에서 예약한 그대로 모스크바에서 관광일정을 예약하고, 또 모스크바에서 ‘서백림’(West Berlin)까지 기차를 이용했다(이와 같은 소련기행은 한국의 경향신문·문화방송 부설 政經硏究所 에서 발행하는 <政經硏究> 1978년 6월호부터 「재미 한국인정치학자 金一平 蘇聯紀行」이라는 제목으로 3회에 걸쳐 연재됐다).

김일평 교수의 소련방문 기행기를 실은 와 단행본 『모스크바에서 北京까지』.

김일평 교수의 소련방문 기행기를 실은 <정경연구>와 단행본 『모스크바에서 北京까지』.

나는 가족과 함께 기차를 타고 유럽을 횡단하는 것은 매우 낭만적이고, 또 구경도 많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상선을 타고 구소련의 블라디보스톡 부근에 있는 나호드카 (Nahodka) 항구에서 내린 것은 보안상의 이유였다. 블라디보스톡 항은 구소련의 군사기지로 사용됐기 때문에 혹시 일본사람들 중에는 스파이가 끼어 다닐지도 모른다는 소련의 의심이 작용해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었다. 1990년 9월 30일 러시아와 한국의 수교가 발표된 후 두 나라 간에 교역량이 매우 증가했고, 또 인적 교류도 매년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활동 무대 하바로프스크

우리 가족은 나호드카 항구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시베리아 광야를 횡단해 하바로프스크까지 가야 했다.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 산림을 횡단해 하바로프스크까지는 거의 일주일이 걸린다. 러시아의 깊게 우거진 산림을 관찰하면서 이들이 엄청난 지하자원이 매장돼 있는 것을 아직도 발굴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생각하기도 했다. 공산주의라는 이데올오기 때문인지 아니면 구소련사회의 노동력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무렵, 우리는 마침내 중부러시아의 수도 하바로브스크에 도착했다.

중앙아시아의 하바로프스크는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활동무대였다. 1918년 소련공산당의 지도자 레닌은 국제공산당운동(Communist International- Comintern)을 조직해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했을 때 중앙아시아의 하바로프스크와 이루스크에 망명해 살던 고려인들(즉 조선사람들)이 이 운동에 많이 참여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의 하바로프스크는 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의 메카와 같은 역할을 했다. 우리 일행은 소련의 관광 안내원의 인도를 받아 하바로프스크 중심가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하바로브프크 공항에 가서 모스크바행 소련국내 항공 에어로프를 탔다. 일본여행사에서 미리 예약해 놓은 호텔에 투숙했다.

<적기>, <노동신문> 팔고 있던 러시아 호텔

이튿날부터 일주일동안 모스크바 시내관광에 나섰다. 아이들과 함께 우리 부부가 이렇게 모스크바에 와서 관광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니 이번 기회에 모스크바의 역사적인 유적지와 박물관을 다 보고 가자고 말했다. 모스크바의 시내 관광은 도쿄에서 예약해 놓은 것과 같이 일주일 동안 호텔에서 묵으면서 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주로 모스크바 시내 관광을 많이 했다.

1977년의 시내는 교통이 그다지 붐비지도 않았고, 또 개인 차량도 거의 없었다. 승용차는 정부기관에 속하는 군용차이고 개인이 소유하는 차는 거의 없었다. 동양계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백계러시아 사람들이 팔 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의 도로는 6차선으로 확 틔어 있고 도쿄의 교통량보다는 훨씬 적은 편이었다. 모스크바 시내의 6차선 도로의 중앙에는 잔디를 입힌 화단을 만들어서 장식했다. 도로변과 인도 사이에는 가로수가 즐비해 있었고 버스 정류장에는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딸 애련이는 소련사람은 조직 속에서 태어나고, 조직 속에서 살다가 죽는 것 같다고 말을 해 우리 가족은 한바탕 웃기도 했다.

모스크바는 사방 880km의 도시, 인구는 1977년 현재 8백만이라 했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1천 만이 넘는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했다. 모스크바는 유럽 제일의 도시일 뿐만 아니라 도쿄나 뉴욕과 맞먹는 대도시로 자처하고 있는 곳이다. 뉴욕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공산권 연구를 하고 있을 때 소련에 대해 들었던 강의의 내용들이 이모저모 주마등처럼 낸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1977년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20여 층의 아파트 단지를 모스크바 시내에서 볼 수 있었다. 마치 도시계획 때 새로 지은 뉴욕의 아파트 단지처럼 느껴져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일행은 모스크바 江 건너 모스크바시의 붉은 광장에 있는 러시아 호텔에 투숙했다. 새로 건축한 호텔이기 때문에 매우 깨끗하고 투숙객도 상당히 많았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은 1970년대 초반에 새로 지은 건물로 6천명 이상의 여객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호텔이었다. 24층까지 엘리베이터로 올라갈 수 있다. 호텔 방의 창을 통해 내려다보면 모스크바 강가의 붉은 광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주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한 호텔이었다. 지방에서 수도로 공무 때문에 올라 온 사람도, 또 관광객이나 그 밖의 용무로 지방에서 모스크바까지 온 사람도 투숙할 수 있는 곳이다. 호텔 로비에 있는 매점에서는 일본의 <赤旗>, 중공의 <人民日報>, 북한의 <勞動新聞>까지 팔고 있었다. 간단한 엽서는 그 자리에서 부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이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정해진 곳은 호텔 남쪽 건물에 있는 큰 식당이었다. 일본에서 함께 온 일행도 같은 테이블에 함께 앉아 마치 성대한 만찬을 베풀어 받는 기분이었다. 우리 가족의 모스크바 관광과 다음해(1978년)의 중국기행문은 『모스크바에서 북경까지』라는 기행문집에 수집돼 있으니 관심이 있는 독자는 참조하시기 바란다.

우리는 모스크바에서 일주일간의 관광을 끝마치고 기차편으로 동독을 거쳐 서백림으로 가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동백림에서 서백림으로 건너가는 길에는 철저한 심사가 있었기 때문에 좀 지루한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서독의 미군군사기지에 복무하고 있는 옛 친구 코프만 대령 부부를 다시 상봉하고 2박 3일을 코프만 대령 집에서 보낸 후 미국에 돌아왔다.

위의 왼편부터 크렘린 궁전, 오른편 사진은 우리 네 식구 정현용, 금련이, 애련이, 그리고 필자 등이 일본 요꼬하마에서 소련 여객선을 타고 러시아의 나호드카 항에 내려서 찍은 사진. 아래쪽 왼편의 러시아인 안내원이 관광설명을 하고 있다. 아래쪽 오른편 사진은 러시아 정통교 교회당 앞에서 필자가 찍은 정현용, 애련이, 금련이 모습.

위의 왼편부터 크렘린 궁전, 오른편 사진은 우리 네 식구 정현용, 금련이, 애련이, 그리고 필자 등이 일본 요꼬하마에서 소련 여객선을 타고 러시아의 나호드카 항에 내려서 찍은 사진. 아래쪽 왼편의 러시아인 안내원이 관광설명을 하고 있다. 아래쪽 오른편 사진은 러시아 정통교 교회당 앞에서 필자가 찍은 정현용, 애련이, 금련이 모습.

그러나 일본에서 풀브라이트 연구교수로 있을 때, 도쿄대에 연구교수 또는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일본의 6개 도시와 동남아시아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싱가폴 등지에 특별강의와 방문강사로 초청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의 문정관 해리 켄달(Harry Kendall)의 후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해리 켄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도쿄대 방문을 회고한다’를 참조하기 바람).

나는 과거에 일어난 역사사실을 기록해서 후세들이 역사를 배우고, 또 그 역사의 사실과 배경을 이해함으로써 역사의 교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데 나의 회고록을 쓰는 목적이 있다고 이 회고록의 서두에서 밝힌 바 있다. 기록해야할 역사적 사실에는 물론 긍정적인 사실도 있을 것이고 또 매우 부정적인 사실도 있을 것이다. 긍정적인 사실이나 부정적인 사실을 막론하고 역사적인 사실은 우리 후세들에게는 모두 교훈으로 남겨 두는 것이 곧 역사다. 역사의 교훈을 잊어버린 민족은 그 역사를 다시 되풀이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부록 ‘미국역사 강의 노트’를 참조하기 바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