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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51) 해외 한민족 위한 ‘민족대학설립’ 구상했으나 결실 맺지 못해

나는 1987년부터 해외 한민족에 대한 관심을 갖고 해외한민족 현황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76~1977년에 풀브라이트 교환교수 장학금으로 도쿄대에서 1년동안 연구하면서, 또 국제기독교대학에서 국제정치학 강의를 하면서 재외동포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게 구체화된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현지의 韓人과 일본인들로부터 자주 들어왔던 ‘재일동포의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작용했다. 일본에는 60만의 한민족이 동등한 대우도 받지 못하고 외국인으로서 살면서 자녀교육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우수한 재일교포의 자녀가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일본의 도쿄대나 일류 대학을 졸업해도 일본학생이 받는 것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차별을 받는다는 사실을 나는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전세계에 ‘디아스포라’로 있는 해외한민족 문제에 대해 나는 미국대학의 교수직에서 은퇴한 후 연구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우선 해외 한민족의 역사부터 연구하고 해외한민족의 미래에 대한 연구는 국제문제의 일환으로 다루기로 구상해 보았다. 그리하여 뉴욕에서 사업을 하는 안충성 박사와 상의했다. 안충성 박사는 내가 1965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에서 연구교수(Research Associate)로 근무할 때 만난 인물로, 이후 보스톤의 MIT로 전학해 해양과학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민족포럼과 MIT 안충성 박사와의 만남

안 박사는 한국해양대를 졸업한 후 現代 그룹에서 오랫동안 근무했기 때문에 한국의 실정에도 매우 밝은 사람이었다. 우선 ‘한민족 포럼’이라는 회합을 시작하고 학술회의에서 발표되는 논문은 ‘한민족 포럼’이 간행하는 잡지에 게재해 발행하기로 했다. 나는 <월간 한민족>의 창간호에 ‘한민족재단 공동의장’으로서 「뉴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는 세계속의 한민족」이라는 ‘신년 권두사’를 썼다. 십수년이 지난 오늘 다시 읽어 보아도 나는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나는 최근 한국에서 실시된 여론조사를 보고 놀랐다. ‘통일문제 전문가의 77.7%가 2020년 이내에 한반도가 통일된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월간 한민족>에 발표한 당시 글의 일부를 보자. “그것은 세계화의 추세로 나아간다면 국가와 국가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는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되기 때문이다. 아직 2020년이 되기에는 10년이나 더 남아있다. 그러나 중동지역에서 볼 수 있는 민족주의의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과연 2020년대에 민족국가는 해체되고 하나의 평등한 세계연합이 전개 될 것인지는 미지수다. 21세기에는 국가는 통합되고 무너져서 하나의 세계공동체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21세기는 통합의 세기이기 때문에 한반도의 휴전선도 무너지고, 남북의 분단도 통일의 시대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정세 변화를 예측한 바 있다. 그러나 안 박사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서 전혀 다른 해양사업에 종사함으로써 뉴욕의 ‘한민족 포럼’은 중단됐고, 뉴욕 후러싱의 ‘한민족연구소’도 문을 닫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남 안충성 박사는 강원도 횡성의 두메산골에서 출생해, 많은 고생 끝에 미국의 명문대학 MIT에서 해양공학 박사학위( Ph. D.)를 받았다. 해양공학 분야에서는 한국의 권위자로 한국인의 긍지를 지켰다. 그는 現代에 재직하면서 우리나라의 산업발전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의 대통령 출마를 도우면서 부산 초원복집 사건에 연류돼 해양공학의 열정과 경험, 그리고 학문을 한국에서 다 펴지 못하고 뉴욕에 와서 새로운 변신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조국을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어머님을 위해 무엇인가 보람 있는 일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원대했던 민족대학 설립 구상

그는 한민족의 인재육성 사업, 특히 21세기를 대비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정보기술 분야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그는 성공한 한인 비즈니스맨으로서 뉴욕 상공회의소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550만 해외 한민족을 위해-민족정론지 <월간 한민족>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한민족재단 이사장으로 미주한인동포와 지구촌 한민족 사회 발전을 위한 각별한 기여를 하기로 약속하고 주어진 미국의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의 후배였다.

김일평 교수 등이 구상하던 민족대학 설립을 보도한  1997년 9월 4일자 기사.

김일평 교수 등이 구상하던 민족대학 설립을 보도한 <조선일보> 1997년 9월 4일자 기사.

그의 자전적 에세이 『보이는 곳까지 뛰어라 그러면 또 보인다』를 한민족포럼에서 출판한 바 있다. 안하남 박사, 시카고의 김원삼 목사와 나를 포함해 우리 세 사람은 함께 힘을 모아서 세계 한민족의 역사연구와 미래에 대처할 구상도 해 보았다. 바로 이 구상이 ‘민족대학’을 뉴욕에 설립하는 것이었다. 위의 사진은 안하남 박사와 시카고의 김원삼 목사와 함께 민족대학의 설립을 구상할 때 조선일보의 우태영 기자가 쓴 당시 기사의 일부다. 20여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내 기억에는 생생하게 남아있다. 당시 우리가 구상하고 있던 ‘민족대학 설립 취지서’를 덧붙여둔다.

民族大學 설립 취지서

미주대륙에는 벌써 150만 명이 넘는 우리 韓民族이 이주하여 살고 있습니다. 韓民族의 이민역사도 10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미주대륙에는 우리 민족의 얼을 심어주고 민족문화를 가르쳐 줄 수 있는 民族大學이 없다는 것은 우리 韓民族의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21세기를 대비하여 민족대학의 설립을 절실하게 요청받고 있습니다. 세계각지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우리 韓民族은 500만이 넘었으며, 우리 민족의 문화를 계승하고 보존하며 세계문화를 창조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韓民族은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있으며 미주대륙에도 우리민족의 문화를 가르치고 또 전세계에 확산시킬 수 있는 교육사업이 절대로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韓民族은 우리의 민족문화와 서양문명을 융합하고 세계문화를 창조하는데 공헌할 수 있는 民族大學이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21세기의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韓民族은 21세기에 대비해 새로운 세계문화를 창조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민족대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民族大學은 미주대륙에 정착한 한민족의 후세와 한국의 신세대를 교육시킬 수 있는 교육기관으로서 비영리적인 교육사업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곳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제2세대 동포와 미주대륙에 산재하여 살고 있는 韓民族에게 민족의 얼을 심어주고 민족문화를 가르쳐 그들이 세계문화 창조에 이바지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고 선구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미주대륙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韓民族은 직장생활에 분주하고 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많은 희생을 했습니다. 民族大學은 그들의 경험을 평가하고 국내에서 받은 교육도 참조하는 동시에 새로운 교육과정을 개발하여 학사(B.A.), 석사(M.A.), 박사 (Ph. D.)학위를 받을 수 있는 평생교육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입니다.

民族大學의 교육방법은 전통적인 교육제도와 방법을 초월하여 새로운 교육방법인 통신교육, 전자매체교육, 장거리교육(Distance Learning)등 새로운 교육기법을 사용하고, 첨단교육기술을 개발하는 동시에 세계적 추세인 교육개혁에도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서울의 YMCA가 최근 수도권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차기 대통령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로 교육문제 해결과 부정부패 척결을 상대적으로 높게 꼽았습니다, 한국에서는 매년 2조원(미화 22억 달러) 이상의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것이 교육문제로 부상되었습니다. 21세기를 대비하여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교육개혁이 불가피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의 교육개혁은 조기유학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며, 한국에서 오는 조기유학생과 연수생을 위하여 민족대학은 어학교육은 물론 새로운 교육과제도 개발하여 유학생들의 모든 편의를 도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유학생과 연수생을 위한 교육도 민족대학이 담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민족대학의 설립을 위하여 교육문화재단을 조직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비영리재단으로 등록하면 민족교육에 헌금하는 금액은 세금의 면세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거액을 희사하는 사람은 재단이사로 영입하여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고, 또 대학부지와 시설을 확충할 때 헌금하는 유지와 명사들에게는 그들의 명예를 길이 보존하기 위해 그들의 성명을 따서 기념관을 설립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입니다.

미주대륙에 이주하여 사업에 전념하는 바람에 고등교육의 기회를 놓친 실업가에게는 명예박사학위를 수영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실업가뿐만 아니라 종교계, 의학계, 문화예술계, 사회사업가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며 많은 공헌을 하고 한국을 빛낸 韓人실업인에게는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는 제도를 민족대학은 설정할 것입니다. 민족대학의 등록명칭은 한민족국제대학(韓民族國際大學, International University of Overseas Koreans) 또는 東西大學 (Eastwestern University), 또는 세종문화대학 등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997년 내에 민족대학 설립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민족대학설립재단을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민족대학의 개교식은 1999년 9월에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1997년 7월 17

民族大學설립준비위원회 위원장 김일평 박사

민족대학 설립교육재단 이사장 김원삼 목사

그러나 안충성 박사는 새로운 해양사업을 개척하기 위해 동남아시아의 싱가포르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결국 민족대학의 설립은 실현되지 못했다.

<계속>

회고록 (50) 기억 속의 그 날들 … 한인회 창립과 한인이민사 집필 무렵

앞서의 글과 마찬가지로 이 글들 역시 김일평 교수가 외부의 청탁을 받아 집필했던 원고의 일부들이다. 회고록 전체의 구성과 전개상 필요한 부분을 게재한다.

나와 뉴욕 한인교회

나는 1957년 9월부터 뉴욕의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뉴욕에는 그해 6월부터 와서 여름방학을 이용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좀 벌어보기로 했다. 그 당시 여름방학이 되면 뉴잉글랜드 지역과 다른 지방에서 많은 유학생이 뉴욕에 모여들고 여름방학 동안 일자리(summer job)를 구해서 3개월 동안 학비와 용돈을 버는 것이다. 나는 콜럼비아대 부근 112번가에 숙소를 정하고 은행에서 3개월 동안 밤일을 했다.

뉴욕의 콜럼비아대 캠퍼스 부근 633 West 115 Street 에는 뉴욕한인교회(Korean Church and Institute) 4층 건물이 있었다. 주일에는 아침 11시에 윤응팔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한 후 교회건물 지하에 내려가서 점심식사를 함께 나누는 친교시간이 있었다. 윤응팔 목사와 그의 사모는 우리 유학생이 한국음식을 맛 볼 수 있게 국수를 삶고 김치도 만들어 주었다. 반세기 전인 1950년대의 뉴욕사회는 40~50명의 유학생이 주류를 이루었고 뉴욕에 정착해 살고 있는 한인은 20~30여명에 불과했다. 그런 환경 탓에 뉴욕에는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제대로 있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한국인이면 누구나 선호하는 김치는 케베이지(감란)로 만들어 먹었던 것이다. 국수도 미국식 스파게티 국수를 삶아서 치킨수프에 넣어서 먹었다.

뉴욕의 한인들은 조국에서 일어나는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 분야에 대한 뉴스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뉴욕타임스>가 한국의 뉴스를 종종 보도하긴 했으나, 매일 일어나는 뉴스는 알 수 없었다. 콜럼비아대의 동아시아 도서관에는 한국에서 보내오는 신문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배로 보내오기 때문에 한 달이 지난 후에야 받아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도착하는 신문기사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1960년 4월 19일 서울에서 학생 데모가 일어난 후에는 미국의 3대 방송매체와 <뉴욕타임스>는 매우 생생한 뉴스를 서울발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우리 한인 학생들은 뉴욕한인교회에 모여서 조국에서 진행되는 학생데모에 동조하는 의미에서 한국영사관 앞에서 데모를 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 당시 뉴욕지역 한국학생회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뉴욕한인교회에서 모이는 집회의 사회를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희생된 한국학생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검은 완장을 팔에 두르고 희생된 그들을 추모하는 데모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뉴욕한인교회는 주일에 예배드리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유학생이 자주 모여서 한국문제를 토론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또 뉴욕의 한인들이 한인교회에 모여서 뉴욕한인회를 조직하고 실행위원회를 소집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미국의 중부 혹은 남부에 와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은 여름에 뉴욕을 방문할 때는 반드시 콜럼비아대 캠퍼스와 뉴욕한인교회를 방문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관례였다. 그것은 뉴욕을 방문하는 한국인은 뉴욕한인교회를 방문해야 한국인을 만나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욕한인교회는 한국학생들의 대화의 광장이었으며, 학생집회를 소집해 민주주의를 배우고 시민사회를 경험하는 광장이기도 했다.

뉴욕 한인회 창립 50주년 기념 강연내용(2010. 6.12.)

뉴욕에는 어느덧 30만이 넘는 한민족이 살고 있다. 뉴욕의 삼각주라고 말하는 뉴욕주, 코네티컷주, 그리고 뉴저지주를 합하면 50만 이상의 한민족이 살고 있다. 뉴욕한인회는 1960년 4월에 창립됐으니 2010년 4월은 뉴욕한인회 창립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따라서 뉴욕의 한인사회가 발전하는 반세기를 회고해보는 것도 뜻 깊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때마침 내가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M.A., Ph.D.)를 공부할 때 뉴욕한인회가 조직됐다. 나는 뉴욕지방 한인학생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한인회 조직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것은 한국 유학생들이 뉴욕한인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뉴욕의 원로 한인들의 부탁과 염원 때문이었다.

다음의 공로패는 뉴욕한인회가 창립 50주년(1960~2010)을 맞이해 지난 반세기동안 내가 뉴욕의 한인사회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전체 한인사회에 공헌한 의미를 기여 수여한 공로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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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이민 100주년 역사를 편집하다

2003년은 우리역사의 매우 뜻 깊은 해다. 한인의 미국이민 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또 한국전쟁이 끝나고 휴전협정을 체결한지 50년이 되는 해다. 한·미간의 방위동맹을 맺은 지도 50년이 지났다. 개인적으로도 내가 미국에 와서 유학생활을 시작한지 반세기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니 2003년은 우리의 민족적으로나 나 자신의 개인적 입장으로나 매우 뜻 깊은 해이다. 지난 반세기를 회고하면서 우리 한민족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면서 뉴욕 한인회의 이민 100주년 기념 사업회의 미국이민 100년 역사편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서 역사책을 편찬했다. 그리고 나의 미국유학 50년사를 포함하는 회고록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나는 미국에서 모두 35년간의 교수생활을 마감하고 1997년에 교수직에서 은퇴했다.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2년간 연구경력을 합하면 35년간의 교직생활을 한 셈이다. 그동안 7년마다 보장된 안식년은 도쿄대 방문교수(1976~1977)와 한국의 한양대 대학원장(1978~1980)시절, 그리고 서울대 외교학과 방문교수(1997~1998)로 지냈다. 미국의 풀브라이트 연구기금으로 우리 가족과 함께 보낸 것이다. 코네티컷 주의 은퇴보상금은 최종 급료의 70%로, 내가 숨이 다할 때까지 지급된다. 물론 의료보험도 다 포함돼 있기 때문에 매년 건강진단과 의약품도 포함돼 있다. 따라서 코네티컷 주의 교육공무원은 미국의 다른 어떤 주립대학보다 매우 좋은 조건으로 대우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교수직에서 은퇴한 후 1996년에 워싱턴의 김휘국 박사와 함께 국제한국학회(ICKS)를 창립하고, 한반도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국제정세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물론 한국인의 미국이민 역사와 세계 속의 한민족의 역사자료를 수집하고 출판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한민족의 해외 활동역사도 여러 권 편찬한 바 있다.

2003년은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이 되는 해다.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을 맞이해 초기이민 노무자, 독립운동에 몸바친 애국선열들의 역사를 기록해 놓기 위해 나는 ‘대뉴욕 한인 100년사 편찬위원장’의 중책을 맡았다. 조병창 대뉴욕한인회장이 발행사를 쓰고, 내가 편찬사를 썼다. 그리고 100주년 미 대통령 선언문과 미 상원 서언문도 포함했다. 축사는 김기철 한인회장, 조지 파타키 뉴욕 주지사, 매그리비 뉴저지 주지사, 그리고 롤랜드 코네티컷 주지사가 기고했다. 메트로폴리탄 뉴욕을 배경으로 살아온 한인들의 역사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4*6 배판으로 5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다. 이 책의 뒷면에는 편집위원장: 김일평 박사·코네티컷 주립대 명예교수, 부위원장: 서진형 IMS 회장·한인이민 100주년 대 뉴욕 기념사업회 공동후원회장, 그리고 편집위원: 하동수 전 뉴욕한인회 사무총장·전 미주한인총연 사무총장, 조종무 라디오코리아-KTV 보도본부장, 화미광 문학박사·전 퀸즈칼리지 교수, 송의용 언론인 등 편찬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나는 편찬사로 「후세들에게 남길 역사의 교훈」을 수록했다.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대뉴욕 기념사업회는 2002년 11월 『대뉴욕 한인 100년사』의 출판을 결정, 나를 편찬위원장에 위촉하고 또 서진형 IMS Systems 회장을 부위원장에 임명했으며 또 송의용 언론인을 간사로 뽑아 편집 및 출판사업을 시작했다. 그동안 28명의 집필진에게 각 분야별 집필을 청탁했으며 1년 이상의 집필 및 편집과정을 거치게 됐다.

『대뉴욕 한인 100년사』를 편찬하는 목적은 우리 이민 선조들이 지난 100년 동안 (1903~2003) 미국 땅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떤 생활을 했으며 미국사회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 기록을 남기는 것이었다. 대뉴욕 지역에 정착한 한인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우리 후세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후세들이 선조들의 경험을 거울삼아 좀 더 바람직하고, 더 훌륭한 생활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하였던 일이다.

편집윈원회는 다음과 같은 집필지침을 세웠다. (1) 원고작성은 기본적인 역사 자료나 구술 역사(Oral History) 자료를 바탕으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집필한다. (2) 편파적이고 주관적인 원고는 출판할 수 없다. (3) 100년 역사의 원고 수준은 학술적인 논문 형식이 아니라 일반 대중의 독자를 위해 알기 쉽게 쓰는 것을 강조한다. (4) 자료의 출처는 반드시 밝혀서 표절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한다.

이렇게 해서 『대뉴욕 한인 100년사』 집필이 시작됐다. 집필진의 절반은 학자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언론인이 썼기 때문에 균형이 잘 잡히지 못한 분야도 있었다. 그러나 편집과정에서 원고검토를 거치고 수정, 보완도 했기 때문에 큰 오류는 피할 수 있었다. 『대뉴욕 한인 100년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집필자의 사정으로 원고청탁을 받고도 집필하지 못한 분야, 또 원고를 쓰겠다고 약속해 놓고 원고 마감까지 제출하지 않은 경우는 빠지게 됐다는 사실을 편집위원회는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 한인들의 자화상이며 빠진 분야가 있다면 그 부분은 다음 기회에 보완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27374_13807_2428이 책의 집필과 출판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조해 준 한인 이민 100주년 대뉴욕 기념사업회 조병태 회장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본문 옆의 사진 속 두 권의 책은 왼쪽이 『대뉴욕 한인 100년사』의 표지이며, 오른쪽의『Korean-Americans: Past, Present, and Future (재미 한국인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주로 한국인 젊은 1.5세 혹은 2세들이 미국의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할 때 재미한인 (Korean-Americans)에 관한 논문 중 일부를 발췌해 이 책에 기고한 것이다. 미국의 도서관협회의 기관지인 <초이스(Choice)>지에 매우 좋은 서평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의 각 대학 도서관은 물론 공립도서관에서 구입했다. 영문으로 된 서평을 여기에 함께 실었다.

CHOICE April 2005

Korean-Americans: Past, Present, and Future, ed. Ilpyong Kim. Hollym,2004. 299p.bibl. ISBN 1565911210 pbk, $24.50. Also (100 Year History of Korean Immigration to the United States)

Korean immigration to Hawai’i began in 1903, and starting in 2003, Korean Americans celebrated the centennial of their history in the US. As part of that commemoration, this anthology explores key facets of the Korean American experience. Editor Kim (Professor of Political Science, University of Connecticut) succinctly reviews the history of Koreans in the US, while Han-Kyo Kim discusses the competing views of the leaders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US. Following their lead, Yong-Ho Choe and Yoon Joh trace the prominent role of churches in the Korean community. Politics, business, and adoption are also examined. Angie Chung analyzes generational politics, even as Sean Oh laments the absence of Korean American visibility in national and state politics. Eunju Lee and Miliann Kang emphasize the importance of women’s work to family incomes and small businesses. Focusing on Korean adoptees, Eleana Kim and Richard Lee examine the identity issues facing this group. The voices of Korean American Youth are also aired in four essays. Overall, this is a convenient and useful introduction to the Korean American experience. Summing Up: Recommended. Suitable for general as well as academic audiences, all levels.

-F. Ng, California State University, Fresno, California.

<계속>

회고록 (49) 뉴욕 한인회 반세기 회고와 50년 미래의 비전

이번 차례에서 소개할 두 개의 글은 뉴욕한인회 회장의 청탁을 받고 집필한 글이다. 먼저 ‘뉴욕한인회 지난 반세기 회고와 50년 미래의 비전’ 부분(이 부분은 필자가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회고록의 전체 구성을 위해 그대로 싣는다. 시점은 당시 이 글을 발표할 무렵의 시점이다. 편집자주)을 먼저 소개한다.

뉴욕한인회는 2010년 11일 맨해튼 뉴욕한인회관 강당에서 ‘창립 5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개최했다. 지난 50년을 돌아보고, 다음 50년을 설계하는 매우 뜻 깊은 행사였다. 필자는 1950년대 콜럼비아대 대학원의 대학원 학생으로 있을 때 ‘뉴욕지역 한인 학생회장’에 당선된 일이 있었다. 나는 한국학생회 회장으로서 1960년 뉴욕한인회가 창립될 때 집행위원회 (현 이사회) 일원으로 참여한 바 있다.

때문에 나는 뉴욕한인회의 지난 50년을 돌이켜 보며 다음 50년을 설계하는 미래지향적인 한인회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뉴욕한인회의 집행부의 헌신적인 노력과 이사진 그리고 자문위원들의 노고로 50주년 행사는 성공적이었다. 우리는 지난 50년을 돌이켜 보며 고칠 것은 고치고 미래지향적인 사고방식으로 다음 50년을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뉴욕한인회는 전환기에 처해 있다. 구시대의 사고방식은 버리고 참신하고 또 창조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사고방식으로 현실에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이번 한인회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뉴욕한인회는 전환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제 31대 하용화 회장단은 과거의 조직과 편성과는 매우 다르게 참신하고 유능한 새로운 회장단과 집행위원회를 조직했다.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대학원 혹은 전문 대학원을 졸업한 1.5세와 2세들이 많이 등용됐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그들은 이민 1세대와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있었다. 나는 이번 뉴욕한인회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았으며 뉴욕한인회의 젊은 부회장단 그리고 임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지난 달 부터 이번 행사에 대한 연락을 전자우편 (이메일)으로 주고받으면서 여러 의견도 교환할 수 있었다. 또 전화통화에서도 느낀 나의 판단은 한인회의 젊은 2세 간부들은 우리 한인사회의 미래지도자라는 것을 직감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민 1세대와는 확실히 달랐다. 또 그래야만 한인사회도 변하고 한인회가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50년 전 뉴욕한인회가 창립되고 초대 회장단부터 제5대 회장단에 이르기까지 한인회 회장단의 대부분은 그 시대의 소산물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네포티슴(연고주의)이 팽배했으며, 매우 비합리적으로 한인회 집행부를 운영하기도 했다. 출신지방과 연고주의 혹은 중고등학교 동창과 친지를 우선해 간부에 등용하는가 하면, 친지 혹은 연고가 없는 교포들은 소외당하는 것이 뉴욕한인회 조직의 특성이었다. 그러나 1965년 미국이민법이 개정되면서 동양인들의 이민 쿼터제가 없어지고 동아시아계를 증폭하는 새로운 이민법이 등장했다. 따라서 1970년대에는 한국인 동포가 수십배로 증가했다.

미국 한인사회가 성장하고 구성원도 바뀌었으며 또 한인동포의 교육수준도 점차 높아졌다. 한인동포 사회의 1.5세와 2세들은 유럽 혹은 다른 지방의 이민사회와는 달리 매우 열심히 일하고 사회봉사에도 적극 참여함으로써 미국 이민사회의 모델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한인사회를 50년 전의 한인사회와 비교할 때 얼마나 많은 발전을 이뤘는지 측정하기 힘들 정도다.

우리 한인사회의 1.5세와 2세들은 전문직에 많이 진출하고 있으며 또 교육계와 실업계에 진출함으로써 한인들의 영향력도 각계각층에서 증가하기 시작했다. 뉴욕한인회의 회장단과 집행부의 요원으로 일하고 있는 젊은 세대 중에는 전문분야에 종사하는 우리동포 1.5세대와 2세들이 대분분이다. 그와 같이 많은 신세대가 뉴욕한인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나는 이번에 처음 보았다.

오늘의 한인회를 50년 전의 한인회와 비교할 때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1950년대의 우리세대와 비교해 볼 때, 21세기의 신세대 사람들은 영어를 미국사람과 똑같이 유창하게 구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식수준과 상식에서도 미국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과 의사소통도 잘된다. 그리고 모든 행사를 계획하고 실무적으로 집행 할 때 그들은 미국사람과 똑같이 매우 합리적으로 모든 업무를 잘 처리 한다. 나는 50년 전 뉴욕한인회 창립멤버와 오늘의 한인회 구성멤버는 양적으로 혹은 질적으로 매우 다르다고 판단한다. 구세대의 문제점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파벌주의와 연고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 또 말은 많이 하는데 실천하는 행동이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 50년의 한인사회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뉴욕 한인사회의 미래상을 한번 예측해 볼 수 있다. 뉴욕한인회가 21세기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려면 혈통주의와 지역연고주의를 초월해 좀 더 합리적이고 기능주의적이며 전문성을 존중하는 한인사회로 변해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난 50년 동안 참여했던 한인사회는 새로운 형태의 한인사회로 변해 갈 것이며, 뉴욕한인회도 오늘의 한인회가 아니라 21세기에 걸맞은 한인회로 변하지 않으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전통을 이어받은 우리 한인 2세와 3세들은 그들의 조상을 존중하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한인회가 해체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부모님과 선배들이 불러 일으킨 한국인의 정신과 문화전통을 이어받아 뉴욕한인회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의 형태와 기능은 매우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고 조직돼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한인 1세대는 뉴욕한인회가 해체돼 없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후손들이 계속 유지하고 또 친목회를 초월하는 한미단체로 육성하는 것이 미래 한인사회의 비전이며 희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계속>

회고록 (48) 미국 移民史에 대한 관심 … 나는 왜 역사를 배우려 했나?

나는 한국을 떠날 때 고등학교 은사님으로부터 미국유학 선물로 역사책 3권을 받았다. 부산에서 미국의 시애틀 까지 2주일 동안 배를 타고 항해하는 동안 나는 『조선역사 개설』 (서울대출판부)와 『도산 안창호』(도산기념사업회) 그리고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를 전부 읽었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는 한국인의 미국 이민 역사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 했다. 한국인의 미국 이민사에도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미국에 이민 온 역사는 한말 고종시대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노동인력을 보낸 1903년부터 그 시초를 찾아 볼 수 있다.

2003년은 한국인이 미국에 이민하기 시작한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서부의 캘리포니아 주를 비롯해 동부의 뉴욕과 보스턴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에서는 미국에 거주하는 100만 명의 한인 이민 100년사를 편집하기 시작했다. 나는 뉴욕의 ‘뉴욕 이민 100년사’의 편집위원장의 중책을 맡고 『대뉴욕 한인 100년사』를 한국어로 편집해 출판했다. 그리고 『Korean-Americans: Past, Present and Future』의 영문책을 편집해서 출판하기도 했다.

한국말로 된 100년사는 출판위원회가 한국의 출판사에 보내서 출판했다. 제본을 잘못해 책 크기(사이즈)가 화보와 같은 크기의 책으로 500쪽이 넘었기 때문에 도서관의 서가에 꽂을 수도 없고, 또 개인 집이나 아파트의 책장에 꽂아 놓을 수 없는 전형적인 화보 책이 되고 말았던 책이었다. 많은 한인들의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무엇 때문에 500페이지가 넘는 『대뉴욕 한인 100년사』를 화보판으로 제본해 하나의 ‘장식품’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했다(아래 두 권 참조).

한국인의 미국 이민사를 정리한 국문판, 영문판 이민사. 이 두 책의 운명은 판이하게 달랐다.

한국인의 미국 이민사를 정리한 국문판, 영문판 이민사. 이 두 책의 운명은 판이하게 달랐다.

그러나 영문판으로 출판된 책 『Korean-Americans: Past, Present and Future』라는 책은 미국의 텍스트 사이즈로 제본됐기 때문에 미국의 대학 교과서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미국에 이민한 一世들의 자녀들이 미국의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학위논문을 한국이민사에 관해 썼기 때문에 미국 각 대학의 사회학 혹은 아시안-아메리컨 (Asian-American Studies)과목의 교과서로 사용하는데 매우 적절하다고 서평을 쓴 학자도 있었다. 이 책은 집필자들이 자기의 박사학위 논문 중 한 장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기고한 원고를 바탕으로 편집한 것이다. 때문에 매우 좋은 서평을 받았으며 미국의 대학도서관뿐만 아니라 일반 도서관에서도 반드시 보유해야 할 책이라고 높이 평가됐다.

영문 책은 각 대학의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으며 한국인 이민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되고 있다. 미국이민 100년을 맞아 미국의 각 도시에 집중해 살고 있는 한국인은 각 도시의 한인 이민 100년사를 출판했다. 예를 들면 보스턴의 한인 이민사, 애틀란타의 한인 이민사, 그리고 서부의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스의 한인 이민사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한국인들이 미국유학을 시작하기 이전인 일본 식민지 시대(1910~1945)에는 미국 이민이 거의 불가능했고, 해방이 된 1945년부터 우리 한국 사람들은 미국으로 본격적으로 유학하기 시작했다. 물론 일제 시대에도 일본 패스포트(여권)를 갖고 1920년대와 30년대에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건너온 한국인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관계되는 역사공부는 많이 하지 못했다.

일본의 게이오대(慶應大)를 창립한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 같은 학자는 미국에 왔다 돌아가서 『西遊記』라는 서방 시찰에 관한 여행기를 썼다. 이 책은 일본사람들의 서양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주었으며 또 서양의 근대화 과정을 많이 공부할 수 있게끔 자극한 책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근대화 목표를 세우고 실행하는데 기반이 된 책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일본 유학생들이 유럽과 미국에 유학한 후 미국에 관해 연구한 결과도 많이 출판됐으며, 또 미국에 대한 일본 서적은 수없이 많은데 왜 한국 유학생들이 미국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서적은 별로 없단 말인가. 일본인과 한국인의 미국연구를 비교하려고 해도 한국 유학생들의 연구결과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왜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한국 유학생은 대부분 미국의 대외정책을 공부하며 미국의 외교정책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한미관계에 대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역사는 서술해 놓았지만 미국 역사에 관한 전문적인 책을 쓴 학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1950년대의 미국 유학생 중에는 미국역사 교과서를 번역해 한국에서 출판해 한국인들이 미국을 이해하는 데 공헌한 학자도 있다. 한국인 유학생은 미국 역사에 관해 전공할 필요가 없었든지 아니면 전공하기에는 너무도 벅차고 어려웠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 유학생 중에는 미국 역사 전문가는 1940년대에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미국역사는 200여년에 불과하기 때문에 공부할 재미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역사공부는 흥미가 생기고 취미가 생겨야만 파고들 수 있다고 한다. 미국 역사는 구라파의 역사에 비하면 매우 짧고 또 흥미가 없기 때문에 공부하지 않고 전공도 하지 않았다면 5천년의 한국역사는 재미가 있어서 공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1950년대의 미국 유학생과는 달리 1960년대부터는 한국에서 해외에 유학을 떠나는 유학생들에게는 한국역사도 유학시험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미국에 유학을 떠나는 학생들은 반드시 국사 시험을 치러야 했다고 우리 후세 한국 유학생들은 말한다. 한국역사 공부는 너무도 지루하고 힘들었다면서 유학시험의 암기식 공부 때문에 역사공부에서 점점 멀어지고 역사공부는 피하게 됐다고 실토하는 유학생도 있었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저명한 역사교수 E. H.카(E. H. Carr) 박사는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책을 저술해 출판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역사를 공부하고 역사의 사실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가에 대해 도움을 많이 주는 책이다. 역사공부는 과거와 현재의 다이아로그(대화)를 객관적으로 기록해 놓은 책이기 때문에 역사를 공부를 해야만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공부를 통해서 우리의 현대사를 이해하고 또 미래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회고록의 서사 시간대를 1960년대로 다시 돌아가 시간의 흐름을 다시 간추려 보겠다. 그 당시 나는 뉴욕한국학생회 회장의 임기를 무난히 끝마치고 몇 개월 동안 문을 닫아걸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콜럼비아대 대학원 박사학위 과정 예비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1963년 가을, 시험 결과 무난히 합격하고 박사학위 논문을 쓸 수 있는 자격을 받았다. 이와 함께 나는 하와이에 새로 설립된 동서문화센터의 선임연구소(Institute of Advanced Studies)의 연구위원으로 임명됐다.

그 무렵 프린스턴대의 한국학 전문가이며 정치학자인 그랜 페이지(Glenn Paige) 교수가 주축이 돼 동서문화센터에 개발도상국가의 개발행정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한국에서는 서울대 행정대학원의 박동서 교수와 스위스 대사를 역임한 이한빈 교수가 참여했고,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일본과 필리핀에서 국제문제와 개발도상국의 개발 행정을 연구하는 교수들이 참여한 세미나였다. 나는 주로 개발행정세미나의 보고를 기록하고 세미나 아젠다를 설정하는 조정관(Coordinator/Rapporteur) 역할을 담당했다. 그와 같은 학술적인 역할은 나의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나는 1964년부터 1965년까지 하와이에서 동서문화센터의 연구위원으로 월급을 받아가면서 직장생활을 했다. 내가 하와이로 떠나기 전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공부하면서 뉴욕의 한인단체에 관여한 일이 있다. 특히 뉴욕한인회를 창립할 때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이라 함은 뉴욕시뿐만 아니라 뉴저지 주와 코네티컷 주를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뉴욕주재 한국총영사관은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됐을 때부터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유학생의 여권관리와 다른 업무를 담당해 왔다. 나는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연구생활(1963~1965)을 거쳐 인디애나주립대(University of Indiana at Bloomington)(1965~1970)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대학생을 가르친 몇 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반세기동안을 메트로폴리탄 뉴욕에서 살고 있었다.

<계속>

뉴욕한인회 반세기 회고와 향후 비전

2010.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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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한인회는 지난 11일 한인회관 강당에서 참립 5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지난 50년을 돌아보고 다음 50년을 설계하는 매우 뜻 깊은 행사였다. 팔자는 1950년대 컬럼비아대 대학원의 학생이었을 때 뉴욕지역 한인 학생회장에 당선된 일이 있었다. 나는 한국학생회 회장으로서 1960년 뉴욕한인회가 창립될 때 집행위원회 (현 이사회) 일원으로 참여한 바 있다. 때문에 나는 뉴욕한인회의 지난 50년을 돌이켜 보며 다음 50년을 설계하는 미래지향적인 한인회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뉴욕한인회는 전환기를 맞고 있다. 구시대의 사고방식은 버리고 참신하고 창조적이며 또 미래지향적인 사고방식으로 현실에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제31대 한인회는 과거의 조직과 매우 다르게 참신하고 유능한 새로운 회장단과 집행위원회를 조직했다. 유능한 1.5세와 2세들이 많이 등용되었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그들은 이민 1세대와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 문제를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번 뉴욕한인회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았으며 뉴욕한인회의 젊은 부회장단 그리고 임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지난 달 부터 이번 행사에 대한 연락을 전자우편 (이메일)로 하며 의견도 교환할 수 있었으며 또 전화통화에서도 느낀 나의 판단은 그들이 우리 한인사회의 미래지도자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민1세대와는 확실이 다르다. 또 그래야만 한인사회도 변하고 한인회가 발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50년전 뉴욕한인회가 창립되고 초대 회장단부터 제5대 회장단에 이르기 까지 한인회 회장단의 대부분은 그 시대의 소산물이었다. 네포티슴(연고주의)가 팽배하였으며 그들은 매우 비합리적으로 한인회 집행부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1965년 미국이민법이 개정되고 동양인들의 쿼터제가 없어지고 동아시아계를 증폭하는 새로운 이민법이 제정되었다. 따라서 1970년대에는 한국인이 수십배로 증가했다. 미국의 한인사회가 성장하고 구성원도 바뀌었으며 또 한인들의 교육수준도 점차 높아졌다. 한인사회의 1.5세와 2세들은 유럽 혹은 다른 지방의 이민사회와는 달리 매우 열심히 일하고 사회봉사에도 적극 참여함으로써 미국이민사회의 모델로 등장한 것이다.

우리 한인사회의 1.5세와 2세들은 전문직에 많이 진출하고 있으며 또 교육계 와 실업계에 진출함으로써 한인들의 영향력도 각계 각층에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문직의 많은 1.5세와 2세들이 뉴욕한인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이번에 처음 보았다. 오늘의 한인회를 50년전의 한인화와 비교할 때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50년전 뉴욕한인회 창립멤버와 오늘의 한인회 구성멤버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매우 다르다고 판단한다. 다음 50년의 한인사회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뉴욕한인사회의 미래상을 한번 예측해 볼 수 있다. 뉴욕한인회가 21세기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혈통주의와 지역연고주의를 초월하여 좀더 합리적이고 기능주의적이며 전문성을 존중하는 한인사회로 변해가는 것이다.

우리가 지난 50년동안 참여했던 한인사회는 새로운 형태의 한인사회로 변해 갈 것이며 뉴욕한인회도 오늘의 한인회가 아니라 21세기에 걸맞는 한인회로 변하지 않으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전통을 이어받은 한인2세와 3세들은 그들의 조상을 존중하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한인회가 해체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부모님과 선배들이 불러 일으킨 한국인의 정신과 문화전통을 이어받아 뉴욕한인회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의 형태와 기능은 매우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고 조직되어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한인 1세대도 뉴욕한인회가 해체되어 없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의 후손들이 계속 유지하고 또 친목회를 초월하는 한미단체로 육성하는 것이 미래 한인사회의 비전이며 희망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출처: http://www.nykorean.org/haninsoc/kaagny/14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