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May, 2013

회고록 (48) 미국 移民史에 대한 관심 … 나는 왜 역사를 배우려 했나?

나는 한국을 떠날 때 고등학교 은사님으로부터 미국유학 선물로 역사책 3권을 받았다. 부산에서 미국의 시애틀 까지 2주일 동안 배를 타고 항해하는 동안 나는 『조선역사 개설』 (서울대출판부)와 『도산 안창호』(도산기념사업회) 그리고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를 전부 읽었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는 한국인의 미국 이민 역사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 했다. 한국인의 미국 이민사에도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미국에 이민 온 역사는 한말 고종시대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노동인력을 보낸 1903년부터 그 시초를 찾아 볼 수 있다.

2003년은 한국인이 미국에 이민하기 시작한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서부의 캘리포니아 주를 비롯해 동부의 뉴욕과 보스턴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에서는 미국에 거주하는 100만 명의 한인 이민 100년사를 편집하기 시작했다. 나는 뉴욕의 ‘뉴욕 이민 100년사’의 편집위원장의 중책을 맡고 『대뉴욕 한인 100년사』를 한국어로 편집해 출판했다. 그리고 『Korean-Americans: Past, Present and Future』의 영문책을 편집해서 출판하기도 했다.

한국말로 된 100년사는 출판위원회가 한국의 출판사에 보내서 출판했다. 제본을 잘못해 책 크기(사이즈)가 화보와 같은 크기의 책으로 500쪽이 넘었기 때문에 도서관의 서가에 꽂을 수도 없고, 또 개인 집이나 아파트의 책장에 꽂아 놓을 수 없는 전형적인 화보 책이 되고 말았던 책이었다. 많은 한인들의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무엇 때문에 500페이지가 넘는 『대뉴욕 한인 100년사』를 화보판으로 제본해 하나의 ‘장식품’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했다(아래 두 권 참조).

한국인의 미국 이민사를 정리한 국문판, 영문판 이민사. 이 두 책의 운명은 판이하게 달랐다.

한국인의 미국 이민사를 정리한 국문판, 영문판 이민사. 이 두 책의 운명은 판이하게 달랐다.

그러나 영문판으로 출판된 책 『Korean-Americans: Past, Present and Future』라는 책은 미국의 텍스트 사이즈로 제본됐기 때문에 미국의 대학 교과서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미국에 이민한 一世들의 자녀들이 미국의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학위논문을 한국이민사에 관해 썼기 때문에 미국 각 대학의 사회학 혹은 아시안-아메리컨 (Asian-American Studies)과목의 교과서로 사용하는데 매우 적절하다고 서평을 쓴 학자도 있었다. 이 책은 집필자들이 자기의 박사학위 논문 중 한 장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기고한 원고를 바탕으로 편집한 것이다. 때문에 매우 좋은 서평을 받았으며 미국의 대학도서관뿐만 아니라 일반 도서관에서도 반드시 보유해야 할 책이라고 높이 평가됐다.

영문 책은 각 대학의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으며 한국인 이민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되고 있다. 미국이민 100년을 맞아 미국의 각 도시에 집중해 살고 있는 한국인은 각 도시의 한인 이민 100년사를 출판했다. 예를 들면 보스턴의 한인 이민사, 애틀란타의 한인 이민사, 그리고 서부의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스의 한인 이민사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한국인들이 미국유학을 시작하기 이전인 일본 식민지 시대(1910~1945)에는 미국 이민이 거의 불가능했고, 해방이 된 1945년부터 우리 한국 사람들은 미국으로 본격적으로 유학하기 시작했다. 물론 일제 시대에도 일본 패스포트(여권)를 갖고 1920년대와 30년대에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건너온 한국인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관계되는 역사공부는 많이 하지 못했다.

일본의 게이오대(慶應大)를 창립한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 같은 학자는 미국에 왔다 돌아가서 『西遊記』라는 서방 시찰에 관한 여행기를 썼다. 이 책은 일본사람들의 서양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주었으며 또 서양의 근대화 과정을 많이 공부할 수 있게끔 자극한 책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근대화 목표를 세우고 실행하는데 기반이 된 책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일본 유학생들이 유럽과 미국에 유학한 후 미국에 관해 연구한 결과도 많이 출판됐으며, 또 미국에 대한 일본 서적은 수없이 많은데 왜 한국 유학생들이 미국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서적은 별로 없단 말인가. 일본인과 한국인의 미국연구를 비교하려고 해도 한국 유학생들의 연구결과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왜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한국 유학생은 대부분 미국의 대외정책을 공부하며 미국의 외교정책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한미관계에 대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역사는 서술해 놓았지만 미국 역사에 관한 전문적인 책을 쓴 학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1950년대의 미국 유학생 중에는 미국역사 교과서를 번역해 한국에서 출판해 한국인들이 미국을 이해하는 데 공헌한 학자도 있다. 한국인 유학생은 미국 역사에 관해 전공할 필요가 없었든지 아니면 전공하기에는 너무도 벅차고 어려웠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 유학생 중에는 미국 역사 전문가는 1940년대에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미국역사는 200여년에 불과하기 때문에 공부할 재미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역사공부는 흥미가 생기고 취미가 생겨야만 파고들 수 있다고 한다. 미국 역사는 구라파의 역사에 비하면 매우 짧고 또 흥미가 없기 때문에 공부하지 않고 전공도 하지 않았다면 5천년의 한국역사는 재미가 있어서 공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1950년대의 미국 유학생과는 달리 1960년대부터는 한국에서 해외에 유학을 떠나는 유학생들에게는 한국역사도 유학시험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미국에 유학을 떠나는 학생들은 반드시 국사 시험을 치러야 했다고 우리 후세 한국 유학생들은 말한다. 한국역사 공부는 너무도 지루하고 힘들었다면서 유학시험의 암기식 공부 때문에 역사공부에서 점점 멀어지고 역사공부는 피하게 됐다고 실토하는 유학생도 있었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저명한 역사교수 E. H.카(E. H. Carr) 박사는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책을 저술해 출판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역사를 공부하고 역사의 사실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가에 대해 도움을 많이 주는 책이다. 역사공부는 과거와 현재의 다이아로그(대화)를 객관적으로 기록해 놓은 책이기 때문에 역사를 공부를 해야만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공부를 통해서 우리의 현대사를 이해하고 또 미래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회고록의 서사 시간대를 1960년대로 다시 돌아가 시간의 흐름을 다시 간추려 보겠다. 그 당시 나는 뉴욕한국학생회 회장의 임기를 무난히 끝마치고 몇 개월 동안 문을 닫아걸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콜럼비아대 대학원 박사학위 과정 예비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1963년 가을, 시험 결과 무난히 합격하고 박사학위 논문을 쓸 수 있는 자격을 받았다. 이와 함께 나는 하와이에 새로 설립된 동서문화센터의 선임연구소(Institute of Advanced Studies)의 연구위원으로 임명됐다.

그 무렵 프린스턴대의 한국학 전문가이며 정치학자인 그랜 페이지(Glenn Paige) 교수가 주축이 돼 동서문화센터에 개발도상국가의 개발행정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한국에서는 서울대 행정대학원의 박동서 교수와 스위스 대사를 역임한 이한빈 교수가 참여했고,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일본과 필리핀에서 국제문제와 개발도상국의 개발 행정을 연구하는 교수들이 참여한 세미나였다. 나는 주로 개발행정세미나의 보고를 기록하고 세미나 아젠다를 설정하는 조정관(Coordinator/Rapporteur) 역할을 담당했다. 그와 같은 학술적인 역할은 나의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나는 1964년부터 1965년까지 하와이에서 동서문화센터의 연구위원으로 월급을 받아가면서 직장생활을 했다. 내가 하와이로 떠나기 전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공부하면서 뉴욕의 한인단체에 관여한 일이 있다. 특히 뉴욕한인회를 창립할 때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이라 함은 뉴욕시뿐만 아니라 뉴저지 주와 코네티컷 주를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뉴욕주재 한국총영사관은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됐을 때부터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유학생의 여권관리와 다른 업무를 담당해 왔다. 나는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연구생활(1963~1965)을 거쳐 인디애나주립대(University of Indiana at Bloomington)(1965~1970)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대학생을 가르친 몇 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반세기동안을 메트로폴리탄 뉴욕에서 살고 있었다.

<계속>

회고록 (47) 시베리아 횡단해 소련연방으로 여행 … 역사의 교훈 생각

우리 가족이 처음 코네티컷 주에 왔을 때 우리는 먼저 교수 아파트에 짐을 풀고, 근처 집값도 알아보고, 또 어디에 위치한 집이 애련이와 금련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편리한지 알아보기 위해 집을 사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 사는 것을 미룬 데는 이유가 있었다. 블루밍턴에서 처음 집을 샀을 때 아이들이 학교에 통학하는 여건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집을 덜컥 샀기 때문에 매우 불편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인디애나를 떠날 때 우리의 집을 팔 수 없었기 때문에 1년 동안 세를 놓아야 했던 것도 한 이유다. 집 문제로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코네티컷의 집은 좀 더 신중을 기해서 20~30년 동안 살 수 있는 집을 구입하기로 했던 것이다.

우리는 교수 아파트에 입주해 있다가 3년 후에야 비로소 우리집을 새로 장만했다. 새로 구입한 집은 전통적인 콜로니얼 하우스(Colonial House)로 2층 집이었다. 아내 정현용은 집을 뜯어 고치고 또 응접실과 식당을 바꾸고, 식사를 준비하면서 밖을 잘 내다볼 수 있고 또 응접실과 뒤뜰의 아름다운 화단의 꽃을 감상 할 수 있는 경치 좋은 집으로 탈바꿈을 했다. 미국의 잡지를 보고 또 연구를 많이 해서 집 밖에서 보면 전통적인 콜로니얼 하우스 형태인데, 집에 들어와서 보면 현대식으로 꾸며놓았으며, 뒤뜰 정원을 감상할 수 있게끔 수리와 보수를 많이 했다. 누가 와서 보더라도 참으로 아름답고, 경치 좋은 집으로 변화시켜 놓은 것은 정현용 박사가 미술감상에 있어서 특유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의 두 아이들이 다닌 고등학교는 1970년대에 코네티컷주립대의 부속 고등학교(E.O. Smith High School)인 공립고등학교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었다. 이곳으로 옮겨가기 전 큰 딸 애련이와 둘째 딸 금련이는 일본에 있는 미국학교(American School in Japan)에 1년간 통학했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교수 사택이 필요했던 나는 국제기독교대학 (International Christian University-ICU)에서 국제정치학을 한 강좌 강의하기로 했다. 이렇게 강좌를 맡아주면 교수 사택을 배려하겠다는 제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국 코네티컷대 학부 강좌인 ‘국제정치학개론(Introduction to International Relations)’을 강의하기로 했다. ICU 캠퍼스는 도쿄의 중심에서 전철로 한 시간 정도 거리인 교외의 미다카에 위치해 있었다. 국제기독교대학은 가로수가 즐비하고 미국의 주립대학 캠퍼스를 연상시키는 경치가 매우 좋은 캠퍼스였다. 나는 1년간 이곳에서 초빙교수로 ‘국제정치학개론’을 강의하기로 결정하고, 아이들은 자전거로 10분 거리에 있는 미국학교에 보냈던 것이다.

도쿄의 미국학교는 미국 동부에 있는 ‘프리패러터리 스쿨’(Preparatory School)같이 미국의 일류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실력을 길러주는 고등학교이다. 일본 대사관에 나와 있는 외교관의 자녀들, 도쿄에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파견돼 있는 각종 상사직원의 자녀들, 그리고 우리와 같이 교환교수로 일본에 나와 있는 교수와 학자들의 자녀, 그리고 미국인 비즈니스맨의 자녀들 등 많은 미국사람과 외국인들의 자녀들이 초등학교 1학년에서 고등학교 3학년까지 공부하는 학교다. 사립고교이기 때문에 미국의 사립고교와 맞먹는 비싼 등록금을 내야 한다. 풀브라이트로 온 학자(Fulbright Scholar)들의 경우, 자녀들의 등록금은 일미교육위원회 (Fulbright Commission in Japan)에서 지불해 주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의 교육비는 우리가 직접 지불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즐거운 1년을 일본에서 보냈다.

애련이는 미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창작에 취미가 있었고 또 재능도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미야케라는 섬에 수학여행을 갔을 때 자기가 보고 또 경험한 것을 수필로 써서 당선되기도 했다. 애련이는 이 글로 미국에서 저명한 ‘Scholastic Award – Writing’상을 받았다고 바로 앞 회에서 서술했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부연해보자.

애련이와 사위 갬펠의 결혼 사진.

애련이와 사위 갬펠의 결혼 사진.

당시 ‘창작 분야’의 특별상을 준 편집자의 코멘트는 이렇다. “This essay is about breaking through the cultural and language barriers that separate people. In a more immediate sense it clearly recalls one of the unusual moments in life when a person gains a clear insight into herself and into the world around her.” (이 수필은 사람들을 떼어놓게 하는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관통하고 있다. 좀 더 직선적으로 말하면 이 수필은 인간이 자신과 자기 주변의 세계에 대한 투명한 통찰력을 얻게 되는 삶의 비범한 순간들의 하나를 분명하게 환기하고 있다). 즉 애련이이의 관찰력과 통찰력에 대한 과찬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재능을 갖고 있는 애련이는 웰슬리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주립대(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의 대학원 영문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는 자신의 창작력을 인정받아 대학 홍보실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었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그녀가 버클리의 가주대학 부총장 겸 개발처장(Director of Development)으로 승진한 것은 카네기재단에서 1억 달러($100 million)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신청서를 그녀가 작성했기 때문이었다.

카네기재단은 주로 사립대학에 창작 지원금을 주는데, 애련이의 신청서(Grant Proposal)가 어찌나 설득력이 있었으면 1억 달러를 주기로 결정했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었다. 애련이는 그동안 사귀던 미국친구 리처드 갬펠(Richard Gampel)과 결혼도 하고 또 장남을 낳았다. 장남 타이러스(Tyrus)는 매우 잘 자라고 있으며 벌써 초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다.

도쿄대 교환교수 생활 마칠 무렵

나는 1976~77년에 일본 도쿄대에 풀브라이트 교환 교수로 1년간 가르친 경험이 있다. 우리 부부가 1977년 미국으로 다시 돌아올 때, 우리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데리고 러시아(구소련)의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모험여행을 했다. 우리 가족은 일본 요꼬하마에서 일본상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 항에 도착해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기차를 타고 하바로프스크까지 가서 다시 항공기로 갈아타고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이 여행 코스는 여행사가 우리에게 만들어 준 여행일정이었다.

40년 전인 그 당시 일본에서 배를 타고 동해를 횡단해 블라디보스톡까지 가서 다시 소련철도를 이용해 모스크바까지 여행한다는 것은 매우 모험적인 여행이었다. 특히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다니는 애련이와 금련이가 잘 참아 준 것이 매우 기특했다. 우리는 일본에서 예약한 그대로 모스크바에서 관광일정을 예약하고, 또 모스크바에서 ‘서백림’(West Berlin)까지 기차를 이용했다(이와 같은 소련기행은 한국의 경향신문·문화방송 부설 政經硏究所 에서 발행하는 <政經硏究> 1978년 6월호부터 「재미 한국인정치학자 金一平 蘇聯紀行」이라는 제목으로 3회에 걸쳐 연재됐다).

김일평 교수의 소련방문 기행기를 실은 와 단행본 『모스크바에서 北京까지』.

김일평 교수의 소련방문 기행기를 실은 <정경연구>와 단행본 『모스크바에서 北京까지』.

나는 가족과 함께 기차를 타고 유럽을 횡단하는 것은 매우 낭만적이고, 또 구경도 많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상선을 타고 구소련의 블라디보스톡 부근에 있는 나호드카 (Nahodka) 항구에서 내린 것은 보안상의 이유였다. 블라디보스톡 항은 구소련의 군사기지로 사용됐기 때문에 혹시 일본사람들 중에는 스파이가 끼어 다닐지도 모른다는 소련의 의심이 작용해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었다. 1990년 9월 30일 러시아와 한국의 수교가 발표된 후 두 나라 간에 교역량이 매우 증가했고, 또 인적 교류도 매년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활동 무대 하바로프스크

우리 가족은 나호드카 항구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시베리아 광야를 횡단해 하바로프스크까지 가야 했다.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 산림을 횡단해 하바로프스크까지는 거의 일주일이 걸린다. 러시아의 깊게 우거진 산림을 관찰하면서 이들이 엄청난 지하자원이 매장돼 있는 것을 아직도 발굴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생각하기도 했다. 공산주의라는 이데올오기 때문인지 아니면 구소련사회의 노동력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무렵, 우리는 마침내 중부러시아의 수도 하바로브스크에 도착했다.

중앙아시아의 하바로프스크는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활동무대였다. 1918년 소련공산당의 지도자 레닌은 국제공산당운동(Communist International- Comintern)을 조직해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했을 때 중앙아시아의 하바로프스크와 이루스크에 망명해 살던 고려인들(즉 조선사람들)이 이 운동에 많이 참여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의 하바로프스크는 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의 메카와 같은 역할을 했다. 우리 일행은 소련의 관광 안내원의 인도를 받아 하바로프스크 중심가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하바로브프크 공항에 가서 모스크바행 소련국내 항공 에어로프를 탔다. 일본여행사에서 미리 예약해 놓은 호텔에 투숙했다.

<적기>, <노동신문> 팔고 있던 러시아 호텔

이튿날부터 일주일동안 모스크바 시내관광에 나섰다. 아이들과 함께 우리 부부가 이렇게 모스크바에 와서 관광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니 이번 기회에 모스크바의 역사적인 유적지와 박물관을 다 보고 가자고 말했다. 모스크바의 시내 관광은 도쿄에서 예약해 놓은 것과 같이 일주일 동안 호텔에서 묵으면서 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주로 모스크바 시내 관광을 많이 했다.

1977년의 시내는 교통이 그다지 붐비지도 않았고, 또 개인 차량도 거의 없었다. 승용차는 정부기관에 속하는 군용차이고 개인이 소유하는 차는 거의 없었다. 동양계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백계러시아 사람들이 팔 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의 도로는 6차선으로 확 틔어 있고 도쿄의 교통량보다는 훨씬 적은 편이었다. 모스크바 시내의 6차선 도로의 중앙에는 잔디를 입힌 화단을 만들어서 장식했다. 도로변과 인도 사이에는 가로수가 즐비해 있었고 버스 정류장에는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딸 애련이는 소련사람은 조직 속에서 태어나고, 조직 속에서 살다가 죽는 것 같다고 말을 해 우리 가족은 한바탕 웃기도 했다.

모스크바는 사방 880km의 도시, 인구는 1977년 현재 8백만이라 했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1천 만이 넘는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했다. 모스크바는 유럽 제일의 도시일 뿐만 아니라 도쿄나 뉴욕과 맞먹는 대도시로 자처하고 있는 곳이다. 뉴욕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공산권 연구를 하고 있을 때 소련에 대해 들었던 강의의 내용들이 이모저모 주마등처럼 낸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1977년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20여 층의 아파트 단지를 모스크바 시내에서 볼 수 있었다. 마치 도시계획 때 새로 지은 뉴욕의 아파트 단지처럼 느껴져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일행은 모스크바 江 건너 모스크바시의 붉은 광장에 있는 러시아 호텔에 투숙했다. 새로 건축한 호텔이기 때문에 매우 깨끗하고 투숙객도 상당히 많았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은 1970년대 초반에 새로 지은 건물로 6천명 이상의 여객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호텔이었다. 24층까지 엘리베이터로 올라갈 수 있다. 호텔 방의 창을 통해 내려다보면 모스크바 강가의 붉은 광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주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한 호텔이었다. 지방에서 수도로 공무 때문에 올라 온 사람도, 또 관광객이나 그 밖의 용무로 지방에서 모스크바까지 온 사람도 투숙할 수 있는 곳이다. 호텔 로비에 있는 매점에서는 일본의 <赤旗>, 중공의 <人民日報>, 북한의 <勞動新聞>까지 팔고 있었다. 간단한 엽서는 그 자리에서 부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이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정해진 곳은 호텔 남쪽 건물에 있는 큰 식당이었다. 일본에서 함께 온 일행도 같은 테이블에 함께 앉아 마치 성대한 만찬을 베풀어 받는 기분이었다. 우리 가족의 모스크바 관광과 다음해(1978년)의 중국기행문은 『모스크바에서 북경까지』라는 기행문집에 수집돼 있으니 관심이 있는 독자는 참조하시기 바란다.

우리는 모스크바에서 일주일간의 관광을 끝마치고 기차편으로 동독을 거쳐 서백림으로 가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동백림에서 서백림으로 건너가는 길에는 철저한 심사가 있었기 때문에 좀 지루한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서독의 미군군사기지에 복무하고 있는 옛 친구 코프만 대령 부부를 다시 상봉하고 2박 3일을 코프만 대령 집에서 보낸 후 미국에 돌아왔다.

위의 왼편부터 크렘린 궁전, 오른편 사진은 우리 네 식구 정현용, 금련이, 애련이, 그리고 필자 등이 일본 요꼬하마에서 소련 여객선을 타고 러시아의 나호드카 항에 내려서 찍은 사진. 아래쪽 왼편의 러시아인 안내원이 관광설명을 하고 있다. 아래쪽 오른편 사진은 러시아 정통교 교회당 앞에서 필자가 찍은 정현용, 애련이, 금련이 모습.

위의 왼편부터 크렘린 궁전, 오른편 사진은 우리 네 식구 정현용, 금련이, 애련이, 그리고 필자 등이 일본 요꼬하마에서 소련 여객선을 타고 러시아의 나호드카 항에 내려서 찍은 사진. 아래쪽 왼편의 러시아인 안내원이 관광설명을 하고 있다. 아래쪽 오른편 사진은 러시아 정통교 교회당 앞에서 필자가 찍은 정현용, 애련이, 금련이 모습.

그러나 일본에서 풀브라이트 연구교수로 있을 때, 도쿄대에 연구교수 또는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일본의 6개 도시와 동남아시아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싱가폴 등지에 특별강의와 방문강사로 초청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의 문정관 해리 켄달(Harry Kendall)의 후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해리 켄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도쿄대 방문을 회고한다’를 참조하기 바람).

나는 과거에 일어난 역사사실을 기록해서 후세들이 역사를 배우고, 또 그 역사의 사실과 배경을 이해함으로써 역사의 교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데 나의 회고록을 쓰는 목적이 있다고 이 회고록의 서두에서 밝힌 바 있다. 기록해야할 역사적 사실에는 물론 긍정적인 사실도 있을 것이고 또 매우 부정적인 사실도 있을 것이다. 긍정적인 사실이나 부정적인 사실을 막론하고 역사적인 사실은 우리 후세들에게는 모두 교훈으로 남겨 두는 것이 곧 역사다. 역사의 교훈을 잊어버린 민족은 그 역사를 다시 되풀이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부록 ‘미국역사 강의 노트’를 참조하기 바람).

<계속>

회고록 (46) 40년 삶의 무대가 되는 코네티컷대로 … 학자로서의 새출발

내가 인디애나대에서 5년간 가르친 후 코네티컷주립대(University of Connecticut, 줄여서 흔히 유콘(UConn)이라고 부른다)으로 옮겨 온지도 벌써 40년이 넘었다. 우리는 UConn에서 1970년 가을학기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의 처 정현용은 인디애나대 도서관 대학원 (Graduate School of Library Science)에서 석사학위(M.A.)를 받았지만 바로 도서관에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코네티컷주립대(UConn)에서 국제정치와 중국정치를 가르치던 첸련 교수가 대만대로 떠났기 때문에 자리가 하나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몰라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석사학위를 하고 일리노이대(University of Illinois)에서 중국역사를 전공한 후 박사학위를 받은 허만 매스트(Herman Mast) 역사학과 교수가 나에게 정보를 제공하면서 정치학과의 루이스 거슨(Lois Gerson) 교수에게 나의 이력서와 중국담당 교수직에 지원하겠다는 편지를 보내라고 전화로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전자우편(E-Mail)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였다. 허만 매스트 교수는 내가 1964년 겨울 우리의 장녀 애련(Irene)을 한국의 장모님에게 맡기고 대만과 홍콩에서 나의 박사학위 논문 자료를 구할 때 대만에서 만난 미국친구다. 그는 나보다 거의 10여년 어린 나이지만 대만 출신 중국여성(Linda)과 대만에서 결혼하고 돌아와서 코네티컷주립대 (UConn)에서 중국역사를 강의하고 있었는데 공부보다는 돈 버는 데 재능이 있어 보였다. 그는 자기가 적극적으로 밀고 로비해서 내가 코네티컷 주로 오게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학위논문도 끝마쳤으며, 인디애나대 교수직 경험도 합하면 이제는 부교수로 승진하고 또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출판하는데 필요한 기금을 코네티컷 대학재단 (University Connecticut Foundation)에 신청하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옮겨오라고 권했다. 특히 나의 처 현용의 대학도서관의 취업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하니 우리는 옮기기로 결정했다.

허만 매스트 교수가 귀띔해준 코네티컷대 정보

정현용은 인디애나 대학원에서 도서관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나, 마땅한 직장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가서 부모님 댁에서 일 년 간 쉬고 있을 때였다. 아내는 애련이와 금련이를 데리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논문을 끝마치라고 말하고 서울에 나가 있었다. 인디애나에서 5년간 살아봐서 알지만 블루밍턴은 매우 작은 학교 촌으로 중국식당도 없었고, 또 중서부 미국인들은 매우 보수적인 동네였다. 외국 사람들은 기껏해야 중국 사람들 몇 명 있었고, 다른 외국인은 아직 많이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인지 외국인이 살기에는 어려운 농촌 지대였다.

코네티컷주립대에 대해 매력을 느낀 것은 뉴욕과 보스턴의 중간 지점에 있기 때문에 주말에는 뉴욕에도 갈 수 있고, 또 보스턴은 한 시간 거리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뉴욕과 보스턴은 하루에 왕래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대학원 시절 뉴욕에서 살았기 때문에 뉴요커로 자처하면서 향수를 느끼는 곳이다. 따라서 나는 서울에 전화를 걸고 나의 처 정현용과 상의한 후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오기를 권고했다. 코네티컷주립대에서는 도서관에 직장도 생기니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정현용은 두 딸을 데리고 블루밍턴으로 돌아와서 봄 학기가 끝날 때까지 짐을 싸고, 이사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1970년 6월에 아이들 (애련이와 금련이)를 새로 산 차에 태우고, 내가 직접 드라이브해서 블루밍턴을 떠나서 코네티컷주립대로 옮겼다. 새로운 삶의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만 매스트 역사학과 교수는 나에게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매우 진보적이기는 하지만 중부의 미국사람들보다 말이 적고, 좀 내성적인 사람들이라고 나에게 알려 주었다. 중서부 사람들은 굉장히 말을 많이 하고, 허세를 부릴 때가 많으나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말 그대로 양키들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지 않고, 확실할 때만 말을 하는 성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한번 말하면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서부 사람들보다 친해지기가 매우 힘들고 시간이 많이 지나면 친해진다는 것이다. 영어로 좀 리저브(Reserve)된 사람들이 코네티컷 양키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번 친해지면 오랜 친구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가족과 함께 40여 년을 코네티컷 주에 살고 있다. 물론 안식년에는 일본 동경 과 한국 서울에서 일년씩 보내기도 했지만, 40년 동안 살았기 때문에 코네티컷 주는 우리의 고향이나 다름이 없다. 코네티컷주립대에 와서 사회적인 활동이 많아지고 또 학계의 활동은 더욱 확대됐다. 우선 코네티컷주립대에 올 때 부교수로 승진하고, 인디애나대의 급료보다 두 배가 넘는 봉급을 받으니 생활수준도 많이 올라갔다. 나의 처 정현용은 코네티컷 대학의 도서관에서 직장을 얻어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멀지 않은 커뮤니티 칼리지 (Community College)의 도서관으로 옮기고 코네티컷주립대 사범대학에서 박사학위 (Ph. D.)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받은 후 커뮤니티 칼리지의 도서관장(Director of Library)으로 임명됐다.

더 왕성해진 학계 활동 그리고 아이들의 성장

우리 부부가 버는 봉급으로는 중류이상의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됐고, 또 딸 둘을 동부의 좋은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 큰 딸 애련이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졸업한 웰스리대학 (Wellesley)을 마치고 버클리의 캘리포니아대 (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 대학원에 가서 영문학 교수가 되려고 공부하다가 글 쓰는 재주가 뛰어 났기 때문에 버클리 대학의 홍보실에 스카우트 당해서 일하다가 홍보담당 부총장보(Assistant Vice Chancellor) 겸 개발부장(Director of Development)으로 근무하고 있다. 카네기재단으로부터 1억 달러 ($100 million)의 기금을 신청한 서류가 통과돼 매우 바쁘게 일하고 있다.

애련이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수학이나 과학 분야보다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또 과제물을 작성 하면 항상 A학점을 받았다. 때문에 웰스리대학에 진학해 영문학을 전공하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영어소설을 한 주에 한권씩 읽었다. 우리가 1976~77년에 풀브라이트 연구기금(Fulbright Research Fellowship)을 받아서 일본의 도쿄대에 가 있을 때 딸아이들은 일본의 아메리칸 스쿨 (American School in Japan)에 다녔다. 그 때 일본의 미야케라는 섬에 수학여행을 갔던 경험을 큰딸 애련이가 마침 수필로 발표했는데, 애련이는 이 글로 미국의 ‘Scholastic Awards – Writing’ 작품상을 1982년 5월 14일에 수상했다. 아래 사진은 바로 그 때의 관련 사진이다.

27211_13609_2158둘째 딸 금련(Katherine, Kate)는 언니 애련이보다 4년 차이가 있지만 고등학교 때 E. O. High School을 졸업하고 매우 좋은 성적으로 보스턴대(Boston University)에 입학해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졸업했다. 어렸을 때에는 치과대학 혹은 의과대학에 간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대학 3학년 때 과학 분야보다는 사회과학에 취미가 더 있기 때문에 사회과학 분야를 전공하고 졸업했던 것이다. 언니가 가주대학 (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에 직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버클리로 가서 언니의 조언을 받아 도서관학으로 석사학위를 끝 마쳤다. 둘째는 어머니의 직업이었던 도서관장 자리를 목표로 공부했다. 그리고 여기 저기 사서로 일했는데 아무리해도 정부기관의 사서가 좋을 듯해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에 취직해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정부기관의 월급도 이제는 상당히 올랐고 또 정부문서보관소의 사서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다른 공무원과 똑같이 전문직 대우를 제대로 받고 있다.

금련이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정부 공무원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정부기관의 공무원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기 때문에 미국정부의 문서보관소에서 일하면서 자기의 취미를 가꾸고 또 워싱턴의 문화 시설과 문화행사에 많이 참여하게 됐다고 매우 기뻐했다. 따라서 자기의 직장을 매우 즐기고 있는 것이다. 금련이는 자기는 항상 돈을 많이 벌어서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대학교수로 있었고, 어머니는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Ph. D.)를 받고 대학 도서관 관장으로 종사 했는데도 항상 긴축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보기에는 학자의 생활은 안정되고 중류생활을 유지하면서 자녀들을 대학까지 교육은 시킬 수 있겠지만 풍족한 생활을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던 것이다. 따라서 자기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겠다고 말했으나, 역시 학계에서 일하고 있으니, 이것도 우리 집안의 내력인 듯하다.

정부 공문서보관소라는 직장은 공무원의 직업이고 은퇴 후에도 퇴직금과 건강보험이 보장돼 있는 전문직이기 때문에 직장에서 은퇴한 후 연금으로 중류생활을 할 수 있고, 또 관광 여행도 일년에 한두번씩 갈 수 있다. 중류사회의 생활이 보장되는 셈이다 (다음의 사진은 금련이가 국민학교 일학년 때 찍었고, 오른편의 사진은 보스턴대를 졸업할 때 찍었다. 애련이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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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회고록 (45) 해리슨군사기지 특강과 ‘미국 대통령 20년주기 불운설’

나는 1965년 인디애나주 블루밍턴(Bloomington)에 있는 인디애나대에서 정치학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미국정치를 공부하는 이들 가운데 성공한 대통령과 실패한 대통령을 주제로 책을 쓴 학자도 여러 명 있다. 내가 정치학을 강의할 무렵 때마침 월남전이 시작돼 아시아정치 과목에는 100여 명의 학생이 등록했는데, 미국이 왜 월남전에 개입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 당시 인디애나 주 수도 인디애나폴리스 부근에는 제9대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딴 해리슨 군사기지(Fort Harrison)가 있었다. 해리슨 군사기지에는 육군부관학교(U.S. Army Adjudant School)와 육군정보학교(U.S. Army Intelligence School) 가 있었으며, 바로 이곳에서 내게 아시아에 관련된 강의를 요청해 왔다고 앞 회에서 언급한 바 있다. 나는 전쟁에 나갈 장교들에게 아시아의 문화와 전통에 관한 내용을 3개월에 한 번씩 강의했다. 1회 강의는 3시간이었다.

우선 나는 군사기지에 위치한 정보학교에 도착했을 때 왜 군사기지를 해리슨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지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들의 대답은 매우 흥미로웠다. 역대 대통령이 당한 불상사(편집자: 이른바 테쿰세의 저주. 미국의 서부개척시대 당시 오하이오 강 유역 지대에서 활동하던 쇼니족의 족장이었던 테쿰세가 1813년 훗날 9대 대통령이 되는 윌리엄 해리슨이 이끄는 부대와 전투 중에 전사하면서 남긴 저주로, 미국 대통령의 임기중 사망을 예언했다고 함)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해리슨은 1841년 3월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1개월 만에 폐렴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으로서 몇 개의 기록을 남겨놓았다고 했다. 첫째는 해리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68세의 고령으로 역대 대통령 중 제일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기록에 남은 것이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69세로 대통령에 당선된 후 최고연장자의 기록을 깨트릴 때까지 140년간 기록을 유지한 셈이다.

제9대 대통령 해리슨이 남긴 징크스

둘째 기록은 해리슨이 대통령 선거 캠페인을 할 때인데, 인디애나가 연방정부의 한 주로 승격되기 이전 해리슨은 주지사로 장기간 근무하면서 토막집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해리슨 자신은 원래 버지니아주의 방대한 농장(Plantation) 소유자 가정 출신인데, 가출해 오하이오 주에 살고 있을 때에도 웅장한 저택에서 살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 선거 이미지 메이커는 토막집에서 살았다고 선전함으로서써 동정표를 더 많이 얻어냈다는 것이다.

이른바 '테쿰세의 저주(미국 대통령 20년 주기 불운설)'로 희생됐다고 미국민들이 생각하고 있는 역대 대통령들. 그 첫 희생자는 해리슨 9대 대통령이다. 왼쪽부터 해리슨, 링컹(16대), 가필드(20대) 미국 대통령. 김일평 교수는 해리슨 대통령의 이름을 딴 '해리슨 군사기지'에서 특강을 하면서, 미국 대통령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른바 ‘테쿰세의 저주(미국 대통령 20년 주기 불운설)’로 희생됐다고 미국민들이 생각하고 있는 역대 대통령들. 그 첫 희생자는 해리슨 9대 대통령이다. 왼쪽부터 해리슨, 링컨(16대), 가필드(20대) 미국 대통령. 김일평 교수는 해리슨 대통령의 이름을 딴 ‘해리슨 군사기지’에서 특강을 하면서, 미국 대통령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을 떠나 현실적 변화의 바람도 한몫 거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828년 대통령 선거에서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이 당선된 후 중서부출신의 소박하고 청렴하며 서민적인 대통령이 당선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해리슨도 그와 같은 서민적 리더를 요청하는 바람과 맞아 떨어져, 자신의 서민 이미지를 선거에 적극 활용하는 전략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이후 제12대의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대통령, 그리고 제16대의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도 정말 정직하고 소박한 토막집 출신이라는 이미지를 널리 홍보하고 당선된 대통령이다.

그리고 ‘토막집으로부터 백악관에 이르기까지’라는 대통령 이미지는 점점 더 강력한 매력으로 등장하게 됐다. 해리슨 대통령이 지닌 앞의 두 기록보다 더 인상 깊은 세 번째 기록은 많은 미국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것은 20년 주기로 당선된 미국 대통령은 임기를 다 끝맺지 못하고 죽는다는 징크스가 있다는 것이다.

1840년에 당선된 해리슨 대통령으로부터 20년이 지난 1860년에 당선된 대통령은 공교롭게도 아브라함 링컨이었다. 링컨은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것을 반대하는 정강을 내걸고 결성된 공화당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는 남북전쟁에서 북부를 승리로 이끌었고 노예제도를 폐지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링컨은 재선되고 남북전쟁을 종결시킨 직후인 1865년 4월 워싱턴의 배우 존 부스(John Wilkes Booth)의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

20년이 지난 1880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제20대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James Garfield)는 정권출범 3개월 후인 1881년 7월 찰스 기도라는 사람의 총에 맞아 부상당하고 9월에 사망했다. 또 하나의 대통령 암살사건은 1901년 9월 제25대 대통령인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도 암살당한 대통령이다. 매킨리는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된 후 대통령재임 2기의 취임식이 끝난 6개월 뒤 뉴욕 버팔로에서 개최된 박람회를 시찰하다가 무정부주의자였던 리온 촐코스(Leon Czolgosz)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미국 대통령의 불운은 계속 이어졌다. 왼쪽부터 워런 하딩(29대), 프랭클린 루즈벨트(32대), 존 F. 케네디(35대) 미국 대통령. 이런 불행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와서 더이상 이어지지 않게 됐다.

미국 대통령의 불운은 계속 이어졌다. 왼쪽부터 워런 하딩(29대), 프랭클린 루즈벨트(32대), 존 F. 케네디(35대) 미국 대통령. 이런 불행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와서 더이상 이어지지 않게 됐다.

192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워런 G. 하딩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정상으로 복귀(Return to Normalcy)’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분골쇄신 선거운동을 한 결과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하딩 정권은 부패와 독직 사건이 계속 일어나서 그는 실망한 끝에 1923년 8월 병으로 사망했다. 암살은 아니었지만, 질병으로 임기중 사망한 것이다.

1940년 제3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5년 4월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보지 못하고 병사했다. 그는 1932년 미국의 대공황이 극심했을 때 제30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미국의 경제를 복구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1940년 제3선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194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제4선에 당선, 그의 임기가 막 시작했을 때 사망한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경제공항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뉴딜(New Deal) 정책으로 미국의 빈부의 격차를 없애고, 부익부 빈익빈으로 이어지는 고식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복지국가 제도로 변화시킨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그런 업적에 미국인들은 ‘제4선 대통령’이란 보답을 한 것이다. 4선 당선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민의 여론은 대통령의 임기를 ‘再任’(8년 임기)로 제한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미국 대통령에 제4선까지 당선될 수 있었던 사람은 루즈벨트 한 사람으로 유일하게 됐다.

1960년 대통령 선거 당시의 어떤 에피소드

이렇게 기록하고보니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1960년 대통령 선거 때 생긴 에피소드 하나가 불현듯 생각난다. 그 무렵 나는 켄터키주에서 대학을 마치고 뉴욕 콜럼비아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대통령 선거 유세운동이 한창일 당시에 워싱턴의 조지타운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박동선 씨가 나를 방문했다. 나는 그와 함께 뉴욕시내의 미국식당에 저녁식사를 하러 나갔다. 그 당시 고객을 안내하는 미국사람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됐다. 나는 그 미국인에게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닉슨과 민주당의 케네디 후보 가운데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서슴지 않고 말했다. 닉슨이나 케네디 두 후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동전을 던지면 어느 쪽이 나오든 그냥 결정해서 찍겠다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이나 다름없이 두 후보는 정책면에서나 혹은 선거연설에서나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누가 당선돼도 상관없다는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 대통령 선거는 열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닉슨과 케네디 후보는 텔레비전에서 공개 정책 논쟁(Policy Debate)을 하게 됐다. 우리는 대학의 스피치 강의시간에 디베이트(Debate)를 하는 규칙과 방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미국대통령후보가 텔레비전 앞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정책논쟁을 벌인다는 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50년대의 미국은 오늘과 같이 텔레비전이 많이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개인 집에서 TV를 시청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리 한국유학생은 선술집인 바(Bar)에 가서 맥주 한잔을 시켜놓고 텔레비전의 공개토론을 지켜보기로 했다.

1960년의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 뉴욕 콜럼비아대 부근에 있는 맥주 집(Bar)에 모여든 한국유학생은 7~8명에 불과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부통령으로 대통령을 승계하겠다는 닉슨 후보는 의기 당당해 보였다. 그 반면에 메사추세츠 주의 연방 상원의원으로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미국의 정치문화를 바꿔놓은 케네디 후보는 매우 참신한 이미지를 보였다. 닉슨은 구세대 사람을 대표하고 있었으며 귀족스타일 정치가라면, 케네디는 일반대중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해 주는 민중의 대통령으로 영상에 비쳐졌다. 그 후 닉슨은 ‘부자들의 가난한 대통령’이라고 낙인이 찍히고, 케네디는 ‘가난한 사람들의 부자 대통령’이라는 말도 나왔다.

케네디는 보스턴 특유의 엑센트로 매우 논리적이고 조리 있게 토론을 전개했다. 닉슨은 냉전시대의 반공 투사와 같이 냉전주의자요 대소 강경론자와 같이 보였다. 특히 미국의 대 쿠바 정책에 관한 토론을 할 때 닉슨은 매우 강경한 논조를 전개하며 쿠바의 카스트로는 제거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반면에 민주당의 케네디 후보는 온건론자로서 미국의 대 쿠바정책은 카스트로 정권을 인정하고 대화와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전개된 TV 논쟁에서 케네디는 평화주의자와 같이 보였고, 닉슨은 전쟁을 불사하는 호전주의자의 이미지를 미국 국민의 마음속에 심어주었다.

닉슨과 케네디 두 후보의 정책토론이 끝나고 우리 한국유학생은 누가 승리했는지 궁금했다. 7~8명중 대부분인 5명은 케네디 후보가 디베이트에서 승리했다고 말하는데 두 학생은 닉슨이 승리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들은 닉슨을 선호하는 이유로 그가 반공주의자이며 또 미국의 강경 일변도의 對共 정책이 좋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가 선호하는 정책과 두 후보가 토론한 내용을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누가 이겼는지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주관적 판단 때문에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오판하는 때도 종종 있다는 것을 이 TV 대선 논쟁을 지켜보면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 대통령 연구의 학문적 진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연구도 1960년에 비하면 오늘날에는 상당히 많이 발전했다. 1950년 대 까지만 해도 연구결과는 대부분 전기와 역사적인 서술이었다. 그러나 심리분석학적 연구방법론의 발전으로 대통령의 중요한 정책결정 당시의 심리학적 분석이 가능해짐에 따라, 대통령의 성격과 인성을 전적으로 엿볼 수 있는 새로운 연구가 진전됐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존 케네디는 적은 표 차이로 제3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그가 3년 뒤인 1963년 11월 텍사스주 달라스에서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케네디 암살의 범인은 리 하베이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라는 사람인데 그는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그는 구소련에도 갔다온 사람이기 때문에 소련의 첩자라고 의심도 받았다. 또 미국내의 범죄집단(마피아)의 음모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오스왈드는 그에 대한 공개재판도 열리기 전에 암살자의 총에 맞아 사망했기 때문에 오스왈드가 케네디를 암살한 정확한 동기를 알 수 없었다. 케네디 암살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정치적·역사적 사건이다.

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 미국의 학자들은 양키들의 고향인 뉴잉글랜드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더욱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 출신 대통령의 전기도 많이 나왔다. 그러고보니 내가 뉴잉글랜드에 와서 산지도 벌서 반세기가 넘었다. 이와 같이 해리슨 대통령이 취임한지 한 달 만에 폐렴으로 사망한 후 120년 동안 20년을 주기적으로 미국 대통령의 신변에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1960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가 암살자의 손에 비운의 객이 된지 20년이 지난 1980년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 3월 존 힝클리(John Hinckley, Jr.)의 총에 맞아서 부상은 입었으나 다행히 사망하지는 않았다. 그는 69세의 최고령으로 당선됐기 때문에 해리슨 대통령의 기록을 깨고, 새 기록을 남긴 것이다. 따라서 해리슨 대통령의 불상사 이후 레이건 대통령의 불상사로 ‘미국 대통령 20년 주기 불운설’은 일단 종식됐다고 볼 수 있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조지 부시 대통령은 2001년 9·11 테러 폭격사건으로 워싱턴의 국방부 빌딩이 폭격 당하고 세계무역센터가 폭파됐을 뿐만 아니라 3천여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국가적 불운’을 맞았지만, 대통령 자신에게는 불상사가 없었다. 해리슨의 불상사와 같은 대통령의 불상사는 레이건 대통령 시대에 이미 끝났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