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October, 2012

회고록 (19) 코 끝에 스며드는 자유의 공기 … 강의 노트 필기하느라 진땀

미국의 대학들의 새 학기는 거의 다 9월 20일 경에 시작한다. 내가 진학하는 애스베리대학교도 9월 23일에 시작했다는 것이다. 1953년 10월 10일에 켄터키에 도착했으니 대학 강의를 시작한지 벌서 2주일이 넘었다. 미국 대학의 캠퍼스는 정말이지 아름다운 경치에 황홀한 분위기였다. 캠퍼스의 가로수에는 벌서 단풍이 물들기 시작해 붉고 노란색으로 매우 찬란한 경치로 변하고 있었다. 여학생들의 옷차림은 우리가 한국에서 씨어스 로버크 카다로그 (Sears Roebuck Catalog)에서 보던 것과 똑 같이 매우 명랑하고 아무런 구김없이 자란 결백하고 순진한 얼굴들뿐이다. 우울하고 고달프게 학비를 벌기에 바쁜 우리 1950년대 한국 학생들의 표정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미국은 참으로 축복 받은 나라이고 미국의 국민은 참으로 행복한 민족이라는 감탄사가 내 가슴 속으로 부터 흘러 나왔다.

낯선 환경과 생활 풍습에 적응하기

한국에서 6·25전쟁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애스베리대에서 모든 등록금과 학비를 받아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을 무엇으로 어떻게 감사해야 될지 몰랐다. 그러나 어느 친구의 말처럼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을 올리고 졸업하는 것이 장학금을 지원해주는 독지가에게 보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나는 밤을 새워가면서 미국 학생들과 경쟁해 우수한 성적을 올려야만 대학원도 진출할 수 있고, 대학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마련해준 독지가에게 보답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대학에 입학했다가 전쟁 때문에 중단하고 한국 육군에서 3년간 연락장교로 복무한 후 미국에 와서 생활 풍습이 우리 한국과 전혀 다른 환경에 적응해 공부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켄터키주 애스베리대의 사무처 모습.

대학 강당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1953년 박상증 목사 촬영)

내가 공부할 강의시간은 벌써 다 등록이 돼 있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편지를 보내고 상선을 타고 가기 때문에 2주일이나 늦게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을 해 놓았기 때문이다. 미국역사와 미국정치론, 그리고 교양과목으로는 서양문명사와 영문학 한 강좌를 등록했다. 나는 기숙사 생활을 희망했기 때문에 학생기숙사에 들어갔다. 아침 7시에 일어나고 대학식당에 가서 아침식사를 끝내고 오전 8시부터는 채플 시간이라 대학 강당에 가서 한 시간 동안 아침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고 나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다.

미국의 대학강의는 한국 대학의 강의와는 매우 다른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상당한 량의 독서를 요구했다. 미국역사 한 강좌에 기본적인 교과서를 읽는 이외에도 매주 200쪽의 책 한 권씩은 필수적으로 읽어야 한다. 그러니 미국역사 한 강좌에 매주 교과서 이외에 200쪽의 분량의 책 한 권을 매일 필수적으로 읽어야하기 때문에, 한 학기에 과목당 15권 내지 20권의 책은 반드시 읽게 된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강의는 거의 10권 내지 15권의 책을 필수적으로 읽어야 학점을 얻을 수 있다. 그 당시 한국에는 도입되지 않은 속독법을 미국대학에서는 가르치고 있었다. 필수 독서량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시간당 독서 분량을 높이고 책읽기 속도를 증가시키는 특수 독서 방법(속독법) 강좌도 들으면서 독서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었다.

독서법 특강까지 들으면서 강의 따라가 

한 주에 네 과목 12학점을 등록해 놓고 매일 책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특히 2주간 밀린 독서량을 따라 가기 위해서는 교수님의 강의가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저녁식사를 끝내면 또 도서관에 달려가서 밤 12시까지 책을 읽어야만 겨우 미국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농구 경기도 볼 시간이 없고, 또 연극이나 오락 프로그램을 보고 음악을 즐기는 시간적 여유도 누릴 수 없었다.

매일 부과되는 과제물의 독서량이 너무도 많은데 질려버린 우리 유학생들은 또 한 가지 문제에 당면하게 된다. 그것은 미국 교수의 강의를 정확히 듣고 강의 노트를 작성하는 문제였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웠고 또 한국전쟁 3년 동안 미국 대학을 졸업한 장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영어회화에는 문제가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의를 듣고 강의노트를 작성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우선 강의를 잘 알아듣고 노트북에 요약하고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은 강의 내용을 여간 잘 알아듣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미국 역사에 관한 지식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강의내용을 100% 다 이해하고 노트해 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 밖에 없다. 미국 학생들은 고등학교 시절 미국역사 강의를 들어 자신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따라서 그날의 강의를 잘 이해하고 노트에 기록하기 위해서는 강의내용을 미리 교과서에서 읽고 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강의를 시작한지 2주일이나 늦게 도착한 나는 강의를 50% 밖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선 강의를 듣고 이해하는 데 정신을 집중하고자 했다. 강의 노트는 우수한 미국 학생의 노트북을 빌려서 정리해 놓고 또 교과서를 열심히 탐독해서 강의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미국 학생들도 매우 열심히 공부한다. 놀 때는 열심히 놀고, 일할 때는 또 열심히 일하는 것이 미국인들의 생활신조다. 그러나 우리 한국 학생은 공부하는 것과 노는 것에 확실한 구분이 없다. 놀면서 공부하고, 공부하면서 노는 것이 우리들의 습관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장교들은 한국인 장군과 장교들을 비교해보고 “한국인은 매우 게으르다”(very lazy)고 평할 때 내가 항상 대답했던 예가 하나 있다. 한국 농촌의 농민들은 새벽의 별을 보고 일을 시작하고 달이 떠야 집에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인은 느리지만 꾸준히 일하기 때문에 게으르지는 않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또 공부도 열심히 잘 한다는 것을 미국인들에게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 한국학생들은 공부하는 것과 휴식을 취하는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미국 학생들은 매우 열심히 공부하며, 놀 때와 공부할 때를 철저히 분간하기 때문에 우리 생활 습관과는 매우 다른 미국 학생들의 공부 태도를 처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드본 코벨트’ 교수의 조언과 미국사 공부

켄터키 주의 애스베리대에 등록할 때 미국 역사 강의를 듣고 싶어서 ‘드본 코벨트’ 교수의 미국사 강의 전반부에 등록했다. 미국사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0년대 부터 1860년 남북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를 전반부로 나누고,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부터 1950년대 한국전쟁까지를 후반부로 나눠 두 학기 동안 공부해야 한다. 나는 담당교수를 찾아가 미국 역사 교과서와 교재를 문의했다. 그러나 미국역사는 매우 어려운 과목이니 1학년 때 등록하지 말고 우선 기초 과목인 ‘서양 문명사’ 두 학기를 등록해서 서양에 관한 기초지식을 쌓아 올리고, 기초영어의 창작 기법, 기초과학분야의 물리학과 화학 등 대학 1, 2 학년 때는 기초과목부터 등록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기초과목 강의를 듣고 3학년이 되면 영어도 많이 늘고 독서방법도 배워서 한 학기에 역사책을 여러 권 읽을 수 있게 됐을 때, 미국역사 강의를 등록하는 게 좋겠다는 충고였다.

나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 교수는, 미국사는 대학 3~4년생이 등록하는 과목이고 또 서양문화사에 관한 기초지식이 있어야만 이해하기 좋고 또 한 학기에 여러 권의 책을 읽어야만 하기 때문에, 미리 알려 준다는 친절한 조언이 돌아왔다. 그의 조언을 따라 나는 대학 1, 2학년 때는 기초과목을 등록해 공부했다. 3학년 때 미국역사 과목을 등록하고 미국역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1953년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복잡하고 어려운 미국유학 수속을 끝마치고 미국에 발을 디뎠다. 한국전쟁 당시 유학생 자격으로 미국에 온다는 것은 특권층의 자녀들이 아니고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50년대에 미국 유학생으로 미국에 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 특권층의 자녀가 아니면 굉장한 배경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당시 최전선에서 군생활 하면 다 죽는 줄만 알고 있었던 부모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들의 병역을 기피하는 시대였다. 나는 대한민국 육군의 연락장교(혹은 통역장교라고도 불렀다)로 전방근무를 마치고 육군에서 명예 제대하는 수속절차를 마친 후 유학의 길을 떠나왔다.

등록금과 숙식을 제공하는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Full Scholarship’이란 장학금을 받아 미국에 와서 4년제 대학의 모든 과정을 무난히 다 끝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과정 등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수속절차를 거친 후 미국의 명문대인 콜럼비아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미국에 와서 공부한다는 것이 한국의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우리는 유학생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씩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과 미국의 대학 교육제도를 비교해 볼 수도 있었으며, 한국의 문화와 미국의 문화를 비교할 수도 있었다.

내가 미국대륙에 처음 발을 딛고 넓고 넓은 대륙을 바라보면서 받았던 첫 번째 인상은 자유의 바람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었고, 무한히 넓은 공간이 있는 곳이 미국대륙이라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넓고 또 무한히 넓은 광야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국 땅을 처음 밟아본 사람은 누구나 다 느끼는 감상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유스러운 느낌이다. 오랜 세월 고전문화와 역사전통에 얽매이고 구속돼 왔던 우리 한국사람 이라면 누구나 다 해방감을 마음껏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36년간의 일본제국주의 통치에서 해방 됐을 때 우리민족이라면 누구나 다 맛보았을 감격과 환희의 느낌을 여기에 와서 다시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다.

<계속>

회고록 (18) 켄터키로 가는 먼 여정 … 흑·백인 전용화장실중 어디로?

나는 옐로우(Yellow) 택시를 잡아타고 시애틀 시내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한국에서 어느 친구가 미국에 가면 반드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한번 타 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개가 뛰는 그림이 그려있는 버스인데 참으로 멋지고 또 매우 편리하다는 것이다(그레이하운드 버스에 관한 웃기는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미국으로 여행가는 한국 사람에게 미국에 가면 개 그림을 붙인 버스가 있는데 꼭 한번 타보라고 했다. 미국에 도착한 그 친구는 ‘개그린 버스’ 정거장을 찾았다. 미국인에게 물어보았으나 그런 버스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보지 못했다는 웃기는 이야기다).

미국의 서북부에 있는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나의 유학 목적지인 중부의 켄터키 주까지 여행 하는데 비행기를 타면 10시간이 걸리고, 기차를 타면 일주일 걸리는 거리였다. 버스를 타도 일주일간 걸리지만 기차표의 가격은 버스표의 5배가 된다는 것이다. 유학생 신분이라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50달러면 버스를 타고 켄터키 주까지 갈 수 있었다. 교통비를 절약해서 학비에 보태 쓴다는 생각이었다.

버스는 밤낮으로 매일 달렸다. 창가에 앉아서 낮에는 밖의 풍경을 즐기며 밤에는 잠을 잤다. 나는 버스 안에서 한국을 떠난 후 미국까지 온 경로를 짚어 보았다. 2주일 동안 태평양을 배로 건너온 것은 매우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항공편보다 선편이 여비가 반액에 불과했기 때문에 학비에 보태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속셈도 있었다. 그리고 동료유학생들과 사귀고 토론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으며 서로 알고 가깝게 지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했던 사이가 여러 차례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며 매우 친근하게 바뀌었다. 선장과 고급승무원이 사용하는 식당에서 식사도 함께 하면서 서로 잘 알게 된 결과 우리는 각자가 공부하는 대학교의 주소를 서로 나누고 편지도 종종 나누었다.

그레이하운드 버스노선, 필자는 1953년 10월 5일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시애틀에서 켄터키주 랙싱턴에 10월 10일에 도착했다.

버스는 10시간의 질주 끝에 유타주의 솔트레이크 시내로 들어섰다. 이 도시는 몰몬교의 대궁전인 ‘테버내클’이 있는 몰몬교회 본산지로 많이 알려진 곳이다. 물론 2002년에는 동계 올림픽도 이곳에서 개최됐다. 저녁 7시가 됐으니 이곳에서 저녁식사 시간으로 30분간 정차할 것이라면서 식사를 하라고 운전기사가 말했다. 다음 도시는 아침 7시에 정차할 것이며 12시간동안 잠잘 수 있는 시간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나는 버스정류장 식당으로 내려갔다. 선박 속에서 마지막 점심 식사를 하고 10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맛있는 저녁식사에 구미가 당겼다.

웨이트리스(식탁 봉사원)가 식단(Menu)을 갖다 주었다. 한번 훑어보니 스테이크가 먹음직하고 또 기름에 튀긴 치킨이 먹고 싶었다. 나는 배가 매우 고팠기 때문에 먹고 싶은 음식이 많았지만 미국식 메뉴를 잘 알 수 없었다. 나는 먹고 싶은 스테이크와 프라이드 치킨 두 조각을 주문했다. 웨이트리스는 좀 이상한 눈치로 나를 쳐다보았으나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오더(주문)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후 갖고 온 음식은 식탁을 가득히 채워놓을 정도로 여러 가지 반찬이 중복돼 나왔다. 고기 두 가지에 이렇게 많은 채소접시가 나오다니 매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2인분의 식사를 홀로 먹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해지고 나 스스로 웃음이 나오며 나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미국의 식탁문화와 메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10월 5일 시애틀에 도착해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린 후 내가 탄 버스는 드디어 켄터키 주의 렉싱턴( Lexington)에 도착했다. 1953년 10월 10일 오전 9시였다.

켄터키주에서 태어난 미국 제16대 대통령 링컨.

켄터키 주는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이 출생한 곳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중 AFKN 라디오에서 유행했던 「나의 옛날 켄터키 집(My Old Kentucky Home)」이란 노래를 연상케 하는 곳이다. 켄터키 주는 넓고 푸른 목장이 광야와 같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경마용 말을 많이 기르는 아름다운 곳이다. 매년 열리는 켄터키 더비라는 경마대회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켄터키 주는 1792년에 처음으로 미합중국 연방에 15번째로 가입했으며 1850년대 까지도 서방의 개척지로 알려져 있다.

렉싱턴 버스정류장에 내렸을 때 나는 매우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내가 공부할 대학 캠퍼스가 있는 윌모어(Wilmore)라는 대학촌까지 가는 지방의 통근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버스 정류장 대합실이 두 개로 나누어져 있지 않은가. 흑인들이 사용하는 대합실과 백인이 사용하는 대합실이 따로 있었다. 화장실도 흑인용과 백인용이 따로 있었다. 나는 유색인종이기는 한데 어디로 갈 것인지 당황해서 서 있었다. 내가 타고 온 버스 운전기사는 저기 백인용 대합실로 가라고 말했다. 여기는 미국의 메이슨 딕슨 라인(Mason-Dixon Line)의 남부이기 때문에 인종차별이 아직도 심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1860년 일어난 미국의 남북전쟁은 흑인노예의 해방문제 때문이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노예해방이라는 정책으로 흑인들과 백인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흑백 동등권을 선포한 유명한 대통령이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미국선교사의 회화연습도 받은 경험이 있다. 그리고 연락장교로 있을 때 미 8군사령부의 장교식당에서 종종 식사대접을 받은 일도 있었다. 그리고 태평양을 건너올 때 선장과 고급 승무원의 식당에서 2주일간 식사를 함께 한 경험도 있다. 그러나 군대 식당이나 산장의 식당에서 정해주는 메뉴에 따라서 식사를 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해서 식사를 주문한 경험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미국대륙의 민간사회의 일반식당과 군대식당은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아는 길도 물어 가라는 말이 있는 것과 같이 식당 종업원에게 좀 더 자세히 물어보고 식단에 대하여 좀 더 확인한 후에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가장 먼저 받은 나의 교훈이 됐던 것이다.

<계속>

회고록 (17)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 마침내 시작된 유학 생활

우리는 아무런 격의도 없이 진지한 토론도 할 수 있게 됐다. 여러 가지 문제를 놓고 토론했지만, 특히 우리 한인 유학생들의 미래에 대한 문제를 가장 많이 토론했다. 우리는 미국유학이 처음이고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면 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리의 선배 유학생들은 무엇을 어떻게 공부했을까. 우리의 선배 유학생들 중에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본의 식민통치시대에 미국에 와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일본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그들은 애국심도 강했고 또 헌신적으로 조국의 해방과 독립운동에 공헌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지, 조국에 무엇을 어떻게 공헌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하고 검토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료 유학생들의 의견은 ‘우리의 선배 유학생은 한국이 일본 식민지 통치에서 독립을 하는 데 공헌했지만 우리 세대의 한국유학생은 분단된 한반도가 전쟁을 피하고 통일을 모색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이 많았다. 이런 문제의식 때문에 미국 유학생 중에는 국제정치와 국제법을 전공해 조국의 통일에 기여하겠다고 뜻을 품은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우리의 꿈을 모두 실현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상당한 시간이 흘러간 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부모님들 ‘한복’ 챙겨주며 한국문화 알리라고 당부

그 당시 우리세대가 미국유학을 떠날 때 한국의 부모와 친지들은 막연하게 미국에 가서 성공해 돌아와서 조국에 봉사하라는 부탁이 많았다. 그리고 미국 사람들 중에는 한국에 대하여 관심도 별로 없었고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으니 한국역사와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우리 유학생의 의무라고 강조하는 선배도 있었다.

유학생 부모님들은 한복을 한 벌씩 여행 가방에 넣어주면서 미국의 교회 혹은 중고등학교와 사회단체가 초청해 한국전쟁과 한국역사에 관한 강연을 부탁할 때는 반드시 한복을 입고 나가라는 것이었다. 한국문화를 미국 사람들에게 알리는 좋은 방법이라고 가르쳐 준 셈이다. 또 우리 한국 문화를 상징하는 풍속도와 부채, 담뱃대 같은 선물도 우리 여행 가방에 넣어주기도 했다. 미국사람들은 한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니 한국문화의 특수성을 강조하며 한국을 열심히 소개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우리 유학생은 한국문화의 대사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라고 우리 선배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에는 많은 차이가 있듯이 우리가 생각했던 미국과, 유학 와서 직접 목격하고 당면하는 미국은 천양지차였다. 우리가 상상하고 생각했던 미국은 꿈속의 그림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고향의 은사 정태시 선생이 책 두 권을 송별 선물로 주시면서 배에서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한 권은 서울대 국사연구실이 편찬해서 출판한 『조선역사 개설』 역사책이고 또 한 권은 『도산 안창호』라는 전기였다. 이 책은 한국의 유명한 소설가 이광수씨가 쓴 도산의 전기였다. 이 두 권의 책은 60년이 흐른 오늘 아직도 나의 서재에 있다. 문교부 유학생 자격시험을 치르기 위해 한국역사를 정독했기 때문에 『도산 안창호』라는 전기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저자는 한국현대문학의 개척자인 춘원 이광수로, ‘도산 안창호 기념 사업회’의 위촉을 받고 집필한 전기다. 1947년 5월에 출판돼 보급되기 시작했다. 60여년이 지난 오늘 나는 아직도 그 책을 소유하고 있으며 종종 읽어본다. 내가 켄터키주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시작할 때 뉴욕을 비롯해서 미국의 각처에 이민 와서 살고 있는 한인사회에서 특강을 해 달라는 초청을 받을 때마다 반드시 이 책을 한번 참조해 보고, 갖고 가서 도산의 유학생 시대의 일화를 소개한 일도 종종 있었다.

귀감이 된 도산 안창호 전기

도산 안창호는 1899년 22세 때 渡美해 공립협회를 창립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20세기 초인 1902년에 부부동반으로 미국에 건너온 것이 사실이다. 그가 우리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발휘하는 일화가 하나 생각난다. 화창한 어느 봄날 도산은 샌프란시스코의 거리에서 한인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의 상투를 붙잡고 싸우는 것을 목격했다. 이를 구경하려고 모여든 미국사람들은 마치 닭싸움을 보듯 매우 신기한 옷차림을 한 동양인 두 사람이 싸우는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

그때 구경꾼 틈에서 한 청년이 나타나 “여보시오, 우리 동포들끼리 이게 무슨 창피한 짓이오.” 하며 뜯어 말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도산 안창호였다. 이와 같은 일화는 오래 전 우리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유명한 일화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다시한번 되새겨 보면서 그와 같은 일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자고 동료유학생에게 말한 기억이 있다.

1903년 첫 이민자들을 싣고 호놀룰루 외항에 도착한 갤릭호의 모습. 한국의 미국 이민 1세대의 시작이다. 김일평 교수 역시 이러한 화물선을 타고 2주간 태평양을 항해한 끝에 시애틀항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도산은 유학의 꿈을 접고 우리 동포사회의 계몽운동과 생활개선 운동을 전개했다. 조선조 말이었던 1900년대 초의 미국에는 한국 유학생은 여러 명 있었으나 이른바 이민자로 온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어떤 이민 역사에는 샌프란시스코 부근에 20여명의 한인들이 인삼장사를 하기 위해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중국을 거쳐서 중국인 상선이나 무역상 틈에 끼어 미국에 입국했다는 것이다. 1903년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한인 이민 노동자들 중에는 사탕수수밭의 노동 일이 너무도 어렵고 힘들어서 집어치우고 노동계약까지 어기면서 미국본토에 옮겨온 사람도 있었다.

도산은 미국의 한인 이민자들의 생활을 좀 더 교양 있고 깨끗하며 능동적인 이민생활로 바꾸기 위해 청결운동부터 시작했다. 한인들의 집은 더럽고 악취가 난다고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다. 집 앞에 있는 뜰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있으나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뒀으니 무성한 잡초를 깎고 화초를 심어서 미화시키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한국인이 살고 있는 집의 문창에는 텅 빈 유리창만 있으니 유리창마다 커튼을 사다가 달았다. 그렇게 해서 집안은 매우 밝은 모습으로 변했다. 한인 이민사회가 점차 변해 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미국유지 한 사람은 한인들 사회에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났다고 기뻐하며 도산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 했다.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다운타운에 건립된 도산 동상

그 미국인은 한인들의 미국 이민 생활이 변해가고 있는 모습에 감탄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인들이 모여서 집회도 할 수 있고 또 영어공부도 하면서 민주적으로 토론하는 방법도 배우고 민주주의 제도를 이해하면서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는 건물 하나를 기증했다. 도산은1904년 미주 한인이 최초로 조직한 단체인 공립협회를 설립하고 한인들의 의식개혁운동을 꾸준히 펴 나갔다. 그는 또 야간학교를 세우고 귤(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노동자를 모집해 영어와 역사, 그리고 지리, 성경 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도산이 교육과 교양이 있는 한인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쏟아 부었던 것은 자신의 피와 땀을 바치는 민족지도자의 자질을 그대로 발로한 것이다.

때마침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일본인 배척운동이 생겼다. 그와 같은 운동의 여파로 동양인들이 환영받지 못하고 있던 차에 한국인들이 미국사람들의 신용을 얻고 환영을 받게 되자 하와이 등 미국각지에서는 캘리포니아주의 리버사이드 부근으로 한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현상도 생겼다. 그리하여 리버사이드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낙원에서 안창호의 소 공화국이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로 평화스럽고 안정된 한인 커뮤니티(공동체)로 탈바꿈하게 됐다. 한인이민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평양 항해 2주만에 시애틀 항구에 도착

우리 한국 유학생은 이와 같은 우리 선조들의 신화 같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면서 반세기 전에 미국에 건너와서 활동한 도산 안창호와 같은 민족지도자로부터 우리는 배울 것도 많고 미국에 대해 공부도 많이 해야 할 필요성을 새삼 느끼게 됐다. 우리가 미국에 대해 무엇을 알아야 하며,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 것은 유학 왔을 때뿐만 아니라 반세기가 넘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땅에 도착한 젊은이들은 우리와 같은 이 질문을 늘 던지고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36년간의 쓰라린 일본 식민지통치를 받아온 우리민족이 해방됐을 때 미군부대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한국에 주둔하게 됐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군대는 반세기가 넘은 오늘도 아직 한국땅에 남아있으며 미군의 한국주둔은 한국의 반미감정을 점차 부추기고 있다. 미국은 과연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인가. 미국 유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생각해 보는 문제다.

태평양 항해를 떠난 지 2주일 후 우리가 타고 온 배는 미국의 서부 워싱턴 주에 있는 시애틀 항구에 도착했다. 1953년 10월 5일의 일이다. 벌써 늦가을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길거리의 가로수는 붉고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단풍이 한창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2주일동안 같은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온 유학 동지들은 이제 여기서 하직인사를 해야 한다. 샌프란시스코(상항) 으로 가는 사람, 롱비치로 떠나는 친구, 그리고 뉴욕으로 떠나는 사람 등 다양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성공의 앞날을 기약하면서 우리는 서로 갈 길을 서둘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