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52)〈한민족포럼〉발행과 그 공헌자 안충성 박사의 기억들

뉴욕의 한인사회가 많이 성장해 2000년대에는 한민족의 미래를 생각하고 또 한민족의 미국이민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 위한 여러 학술회의와 연구단체들이 생겨났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나는 하와이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에서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연구위원(Research Associate)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강원도 횡성 출신인 안충성 씨를 만났다.

앞에서 술회한 그대로, 그는 한국에서는 해양대학을 졸업한 뒤 해군 복무를 마치고 하와이대(University of Hawaii)에 유학을 왔다. 자기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는 해양과학(Marine Science)이기 때문에 하와이로 유학을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만나서 동서문화센터 식당에서 식사를 함께 하면서 조국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며 매우 가까이 지냈다. 그 뒤 안충성 씨는 보스턴의 MIT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가서 현대그룹에서 근무 했다. 내가 코네티컷주립대(University of Connecticut)로 옮겨온 후 뉴욕의 안충성 박사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가 현대에 입사한 후 겪었던 모종의 사건이 계기였다(회고록 51회 참조).

‘개천에서 용이 난다’라는 한국 속담

10년 전인 1998년 9월에 한민족포럼이 주도해서 하남 안충성 박사의 자전적 에세이집 『보이는 곳까지 뛰어라 그러면 또 보인다』의 출판기념회를 뉴욕 아스토리아 월드 메이너에서 개최한 것이 아직도 내 기억에는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는 비즈니스를 하면서도 한민족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해외 ‘한민족포럼’을 조직하고 운영하기 시작했다. 나는 안 박사가 개최하는 해외 한민족 회의에 조직위원장으로 적극 참여 했으며 <한민족 포럼>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도왔다. 안 박사가 자전적 수필을 써서 출판기념회를 할 때 나는 서평을 써서 강연한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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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자전적 에세이를 읽고 내가 받은 느낌은 한국 속담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말 그대로였다. 이미 앞에서 언급하기도 했지만, 좀더 그에 관한 기억을 살려 보기로 한다. 안 박사는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현천리라는 시골에서 태어나고 국립인 한국해양대를 졸업한 후 미국 명문대인 MIT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 조선공학 분야 박사학위를 받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이후 그는 미국의 여러 기업에서 근무하다가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에게 발탁돼 현대상선 사장에 임명돼 조국에 봉사할 수 있었다.

현대그룹에서 근무할 때 ‘닥터 안’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역시 미국의 명문대학인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던 이력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의 꼼꼼한 성품과도 관련된다. 안 박사는 모든 일을 꼼꼼하게 잘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수준도 매우 높아 비범했다. 현대그룹의 성장을 도운 인물 가운데 손꼽을 수 있는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현대에서 닥터 안과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 중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말에 따르면 닥터 안의 치밀하고 섬세한 통찰력,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누구도 따라 갈 수 없었다고 한다. 닥터 안은 참으로 타고난 재주와 총명한 지능의 소유자였다.

내가 하와이대 캠퍼스에서 닥터 안을 처음 만난 1963년 당시 안 박사는 하와이대 해양과학과에서 석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 거의 반세기 전의 일이다. 그 당시 안 박사는 20대 젊은 청년으로 혈기가 왕성했다. 나는 1950년대에 미국에 유학 와서 뉴욕의 콜럼비아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 과정을 끝내고 하와이대에 새로 생긴 동서문화센터의 부설 연구소(Institute of Advanced Project at East-West Center)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연구를 시작한 때였다. 어쩌면 우리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삶의 궤도에 있었지만, 젊은 혈기와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머나먼 타향에서 학업에 전념한 것은 같은 이유에서였을지도 모른다.

안 박사는 석사학위를 마치고 곧 MIT에 새로 생긴 해양공학과에서 장학금 (Full Scholarship) 을 받고 박사학위를 하게 됐다. 무엇보다 그는 한반도의 동쪽에는 동해, 서쪽에는 황해, 남쪽에는 태평양 삼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양공학을 연구해서 한국의 미래발전에 공헌하겠다는 애국심에 불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강원도 산간 출신인 그가 생소한 해양공학을 전공하는 동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해양분야의 선두주자로 외길로만 뛰어 성공했으며 아직도 해양공학 분야의 연구와 실무에 종사하고 있다.

‘닥터 안’의 물려받은 혈통과 열정

안 박사의 선친은 일본 제국주의 통치시대에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부친의 전통을 이어받은 닥터 안의 애국심은 매우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애국심과 열정은 그 자신을 미국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비즈니스맨으로 만든 동시에 한국의 문화를 미국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모든 힘을 쏟게 만들었다. 일찍 한민족 포럼 재단을 설치하고 격 월간지 <한민족 포럼>을 발행하며 우리 한인 1.5세들과 2세들의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 놓은 것도 그런 열정의 소산이었다. 또 한민족 포럼이 더욱 발전해 재미동포에게도 한국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그들의 교양을 증진 시킬 수 있게 한 것도 안 박사의 분명한 업적이다.

한민족 포럼이 주최하는 한민족 학술회의는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해외 한민족의 긍지를 북돋는 동시에 그들의 자녀들이 한국문화를 좀 더 잘 이해하고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지닐 수 있게 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한민족 포럼이 주최하는 국제학술회의는 한국의 전문가, 해외 각처에 살고 있는 지식인과 문화인 등을 초대해 상호간의 학술교류를 통해 해외한민족이 한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한민족포럼은 또 차세대의 한글 교육과 한국문화 교육을 어떻게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그 방향을 설정하는 학술회의도 개최하고 있다. 안 박사는 차세대 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국인 이민자들의 2세와 3세들이 미국사회에서 자라면서 미국교육을 받고 있으며 미국문화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한국문화 교육과 그들의 한국 역사관을 바로 잡아주기 위한 ‘차세대 교육 프로그램’도 한민족 포럼의 과제라고 생각한 그는 다양한 해결방법을 찾고 있었다.

우리 한민족은 미국속의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또 우리 후세들에게 이중문화를 보급하면서 한국문화의 우월성을 인식시키는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 안 박사의 비전이 꿈이 아니라 현실로 실현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고희를 앞둔 안 박사는 다음 10년을 어떻게 하면 우리 한국문화를 미국사람과 다른 민족에 보급하고 우리 문화의 우수함을 해외 한민족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알린 것인가 하는 과제에 모든 힘을 다하고 있다. 그런 그를 우리는 곁에서 도와주며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뉴욕의 유일한 한민족 포럼을 창립하고 우리 한민족의 우수성과 미래 지향적인 문화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모색하면서 묵묵히 자신의 삶을 헌신해온 안 박사의 지난 공헌에 다시한번 깊이 감사드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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