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hor Archive: ilpyongkim

회고록 (46) 40년 삶의 무대가 되는 코네티컷대로 … 학자로서의 새출발

내가 인디애나대에서 5년간 가르친 후 코네티컷주립대(University of Connecticut, 줄여서 흔히 유콘(UConn)이라고 부른다)으로 옮겨 온지도 벌써 40년이 넘었다. 우리는 UConn에서 1970년 가을학기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의 처 정현용은 인디애나대 도서관 대학원 (Graduate School of Library Science)에서 석사학위(M.A.)를 받았지만 바로 도서관에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코네티컷주립대(UConn)에서 국제정치와 중국정치를 가르치던 첸련 교수가 대만대로 떠났기 때문에 자리가 하나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몰라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석사학위를 하고 일리노이대(University of Illinois)에서 중국역사를 전공한 후 박사학위를 받은 허만 매스트(Herman Mast) 역사학과 교수가 나에게 정보를 제공하면서 정치학과의 루이스 거슨(Lois Gerson) 교수에게 나의 이력서와 중국담당 교수직에 지원하겠다는 편지를 보내라고 전화로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전자우편(E-Mail)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였다. 허만 매스트 교수는 내가 1964년 겨울 우리의 장녀 애련(Irene)을 한국의 장모님에게 맡기고 대만과 홍콩에서 나의 박사학위 논문 자료를 구할 때 대만에서 만난 미국친구다. 그는 나보다 거의 10여년 어린 나이지만 대만 출신 중국여성(Linda)과 대만에서 결혼하고 돌아와서 코네티컷주립대 (UConn)에서 중국역사를 강의하고 있었는데 공부보다는 돈 버는 데 재능이 있어 보였다. 그는 자기가 적극적으로 밀고 로비해서 내가 코네티컷 주로 오게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학위논문도 끝마쳤으며, 인디애나대 교수직 경험도 합하면 이제는 부교수로 승진하고 또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출판하는데 필요한 기금을 코네티컷 대학재단 (University Connecticut Foundation)에 신청하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옮겨오라고 권했다. 특히 나의 처 현용의 대학도서관의 취업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하니 우리는 옮기기로 결정했다.

허만 매스트 교수가 귀띔해준 코네티컷대 정보

정현용은 인디애나 대학원에서 도서관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나, 마땅한 직장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가서 부모님 댁에서 일 년 간 쉬고 있을 때였다. 아내는 애련이와 금련이를 데리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논문을 끝마치라고 말하고 서울에 나가 있었다. 인디애나에서 5년간 살아봐서 알지만 블루밍턴은 매우 작은 학교 촌으로 중국식당도 없었고, 또 중서부 미국인들은 매우 보수적인 동네였다. 외국 사람들은 기껏해야 중국 사람들 몇 명 있었고, 다른 외국인은 아직 많이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인지 외국인이 살기에는 어려운 농촌 지대였다.

코네티컷주립대에 대해 매력을 느낀 것은 뉴욕과 보스턴의 중간 지점에 있기 때문에 주말에는 뉴욕에도 갈 수 있고, 또 보스턴은 한 시간 거리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뉴욕과 보스턴은 하루에 왕래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대학원 시절 뉴욕에서 살았기 때문에 뉴요커로 자처하면서 향수를 느끼는 곳이다. 따라서 나는 서울에 전화를 걸고 나의 처 정현용과 상의한 후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오기를 권고했다. 코네티컷주립대에서는 도서관에 직장도 생기니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정현용은 두 딸을 데리고 블루밍턴으로 돌아와서 봄 학기가 끝날 때까지 짐을 싸고, 이사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1970년 6월에 아이들 (애련이와 금련이)를 새로 산 차에 태우고, 내가 직접 드라이브해서 블루밍턴을 떠나서 코네티컷주립대로 옮겼다. 새로운 삶의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만 매스트 역사학과 교수는 나에게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매우 진보적이기는 하지만 중부의 미국사람들보다 말이 적고, 좀 내성적인 사람들이라고 나에게 알려 주었다. 중서부 사람들은 굉장히 말을 많이 하고, 허세를 부릴 때가 많으나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말 그대로 양키들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지 않고, 확실할 때만 말을 하는 성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한번 말하면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서부 사람들보다 친해지기가 매우 힘들고 시간이 많이 지나면 친해진다는 것이다. 영어로 좀 리저브(Reserve)된 사람들이 코네티컷 양키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번 친해지면 오랜 친구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가족과 함께 40여 년을 코네티컷 주에 살고 있다. 물론 안식년에는 일본 동경 과 한국 서울에서 일년씩 보내기도 했지만, 40년 동안 살았기 때문에 코네티컷 주는 우리의 고향이나 다름이 없다. 코네티컷주립대에 와서 사회적인 활동이 많아지고 또 학계의 활동은 더욱 확대됐다. 우선 코네티컷주립대에 올 때 부교수로 승진하고, 인디애나대의 급료보다 두 배가 넘는 봉급을 받으니 생활수준도 많이 올라갔다. 나의 처 정현용은 코네티컷 대학의 도서관에서 직장을 얻어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멀지 않은 커뮤니티 칼리지 (Community College)의 도서관으로 옮기고 코네티컷주립대 사범대학에서 박사학위 (Ph. D.)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받은 후 커뮤니티 칼리지의 도서관장(Director of Library)으로 임명됐다.

더 왕성해진 학계 활동 그리고 아이들의 성장

우리 부부가 버는 봉급으로는 중류이상의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됐고, 또 딸 둘을 동부의 좋은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 큰 딸 애련이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졸업한 웰스리대학 (Wellesley)을 마치고 버클리의 캘리포니아대 (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 대학원에 가서 영문학 교수가 되려고 공부하다가 글 쓰는 재주가 뛰어 났기 때문에 버클리 대학의 홍보실에 스카우트 당해서 일하다가 홍보담당 부총장보(Assistant Vice Chancellor) 겸 개발부장(Director of Development)으로 근무하고 있다. 카네기재단으로부터 1억 달러 ($100 million)의 기금을 신청한 서류가 통과돼 매우 바쁘게 일하고 있다.

애련이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수학이나 과학 분야보다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또 과제물을 작성 하면 항상 A학점을 받았다. 때문에 웰스리대학에 진학해 영문학을 전공하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영어소설을 한 주에 한권씩 읽었다. 우리가 1976~77년에 풀브라이트 연구기금(Fulbright Research Fellowship)을 받아서 일본의 도쿄대에 가 있을 때 딸아이들은 일본의 아메리칸 스쿨 (American School in Japan)에 다녔다. 그 때 일본의 미야케라는 섬에 수학여행을 갔던 경험을 큰딸 애련이가 마침 수필로 발표했는데, 애련이는 이 글로 미국의 ‘Scholastic Awards – Writing’ 작품상을 1982년 5월 14일에 수상했다. 아래 사진은 바로 그 때의 관련 사진이다.

27211_13609_2158둘째 딸 금련(Katherine, Kate)는 언니 애련이보다 4년 차이가 있지만 고등학교 때 E. O. High School을 졸업하고 매우 좋은 성적으로 보스턴대(Boston University)에 입학해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졸업했다. 어렸을 때에는 치과대학 혹은 의과대학에 간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대학 3학년 때 과학 분야보다는 사회과학에 취미가 더 있기 때문에 사회과학 분야를 전공하고 졸업했던 것이다. 언니가 가주대학 (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에 직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버클리로 가서 언니의 조언을 받아 도서관학으로 석사학위를 끝 마쳤다. 둘째는 어머니의 직업이었던 도서관장 자리를 목표로 공부했다. 그리고 여기 저기 사서로 일했는데 아무리해도 정부기관의 사서가 좋을 듯해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에 취직해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정부기관의 월급도 이제는 상당히 올랐고 또 정부문서보관소의 사서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다른 공무원과 똑같이 전문직 대우를 제대로 받고 있다.

금련이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정부 공무원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정부기관의 공무원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기 때문에 미국정부의 문서보관소에서 일하면서 자기의 취미를 가꾸고 또 워싱턴의 문화 시설과 문화행사에 많이 참여하게 됐다고 매우 기뻐했다. 따라서 자기의 직장을 매우 즐기고 있는 것이다. 금련이는 자기는 항상 돈을 많이 벌어서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대학교수로 있었고, 어머니는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Ph. D.)를 받고 대학 도서관 관장으로 종사 했는데도 항상 긴축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보기에는 학자의 생활은 안정되고 중류생활을 유지하면서 자녀들을 대학까지 교육은 시킬 수 있겠지만 풍족한 생활을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던 것이다. 따라서 자기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겠다고 말했으나, 역시 학계에서 일하고 있으니, 이것도 우리 집안의 내력인 듯하다.

정부 공문서보관소라는 직장은 공무원의 직업이고 은퇴 후에도 퇴직금과 건강보험이 보장돼 있는 전문직이기 때문에 직장에서 은퇴한 후 연금으로 중류생활을 할 수 있고, 또 관광 여행도 일년에 한두번씩 갈 수 있다. 중류사회의 생활이 보장되는 셈이다 (다음의 사진은 금련이가 국민학교 일학년 때 찍었고, 오른편의 사진은 보스턴대를 졸업할 때 찍었다. 애련이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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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회고록 (45) 해리슨군사기지 특강과 ‘미국 대통령 20년주기 불운설’

나는 1965년 인디애나주 블루밍턴(Bloomington)에 있는 인디애나대에서 정치학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미국정치를 공부하는 이들 가운데 성공한 대통령과 실패한 대통령을 주제로 책을 쓴 학자도 여러 명 있다. 내가 정치학을 강의할 무렵 때마침 월남전이 시작돼 아시아정치 과목에는 100여 명의 학생이 등록했는데, 미국이 왜 월남전에 개입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 당시 인디애나 주 수도 인디애나폴리스 부근에는 제9대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딴 해리슨 군사기지(Fort Harrison)가 있었다. 해리슨 군사기지에는 육군부관학교(U.S. Army Adjudant School)와 육군정보학교(U.S. Army Intelligence School) 가 있었으며, 바로 이곳에서 내게 아시아에 관련된 강의를 요청해 왔다고 앞 회에서 언급한 바 있다. 나는 전쟁에 나갈 장교들에게 아시아의 문화와 전통에 관한 내용을 3개월에 한 번씩 강의했다. 1회 강의는 3시간이었다.

우선 나는 군사기지에 위치한 정보학교에 도착했을 때 왜 군사기지를 해리슨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지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들의 대답은 매우 흥미로웠다. 역대 대통령이 당한 불상사(편집자: 이른바 테쿰세의 저주. 미국의 서부개척시대 당시 오하이오 강 유역 지대에서 활동하던 쇼니족의 족장이었던 테쿰세가 1813년 훗날 9대 대통령이 되는 윌리엄 해리슨이 이끄는 부대와 전투 중에 전사하면서 남긴 저주로, 미국 대통령의 임기중 사망을 예언했다고 함)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해리슨은 1841년 3월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1개월 만에 폐렴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으로서 몇 개의 기록을 남겨놓았다고 했다. 첫째는 해리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68세의 고령으로 역대 대통령 중 제일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기록에 남은 것이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69세로 대통령에 당선된 후 최고연장자의 기록을 깨트릴 때까지 140년간 기록을 유지한 셈이다.

제9대 대통령 해리슨이 남긴 징크스

둘째 기록은 해리슨이 대통령 선거 캠페인을 할 때인데, 인디애나가 연방정부의 한 주로 승격되기 이전 해리슨은 주지사로 장기간 근무하면서 토막집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해리슨 자신은 원래 버지니아주의 방대한 농장(Plantation) 소유자 가정 출신인데, 가출해 오하이오 주에 살고 있을 때에도 웅장한 저택에서 살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 선거 이미지 메이커는 토막집에서 살았다고 선전함으로서써 동정표를 더 많이 얻어냈다는 것이다.

이른바 '테쿰세의 저주(미국 대통령 20년 주기 불운설)'로 희생됐다고 미국민들이 생각하고 있는 역대 대통령들. 그 첫 희생자는 해리슨 9대 대통령이다. 왼쪽부터 해리슨, 링컹(16대), 가필드(20대) 미국 대통령. 김일평 교수는 해리슨 대통령의 이름을 딴 '해리슨 군사기지'에서 특강을 하면서, 미국 대통령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른바 ‘테쿰세의 저주(미국 대통령 20년 주기 불운설)’로 희생됐다고 미국민들이 생각하고 있는 역대 대통령들. 그 첫 희생자는 해리슨 9대 대통령이다. 왼쪽부터 해리슨, 링컨(16대), 가필드(20대) 미국 대통령. 김일평 교수는 해리슨 대통령의 이름을 딴 ‘해리슨 군사기지’에서 특강을 하면서, 미국 대통령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을 떠나 현실적 변화의 바람도 한몫 거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828년 대통령 선거에서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이 당선된 후 중서부출신의 소박하고 청렴하며 서민적인 대통령이 당선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해리슨도 그와 같은 서민적 리더를 요청하는 바람과 맞아 떨어져, 자신의 서민 이미지를 선거에 적극 활용하는 전략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이후 제12대의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대통령, 그리고 제16대의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도 정말 정직하고 소박한 토막집 출신이라는 이미지를 널리 홍보하고 당선된 대통령이다.

그리고 ‘토막집으로부터 백악관에 이르기까지’라는 대통령 이미지는 점점 더 강력한 매력으로 등장하게 됐다. 해리슨 대통령이 지닌 앞의 두 기록보다 더 인상 깊은 세 번째 기록은 많은 미국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것은 20년 주기로 당선된 미국 대통령은 임기를 다 끝맺지 못하고 죽는다는 징크스가 있다는 것이다.

1840년에 당선된 해리슨 대통령으로부터 20년이 지난 1860년에 당선된 대통령은 공교롭게도 아브라함 링컨이었다. 링컨은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것을 반대하는 정강을 내걸고 결성된 공화당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는 남북전쟁에서 북부를 승리로 이끌었고 노예제도를 폐지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링컨은 재선되고 남북전쟁을 종결시킨 직후인 1865년 4월 워싱턴의 배우 존 부스(John Wilkes Booth)의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

20년이 지난 1880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제20대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James Garfield)는 정권출범 3개월 후인 1881년 7월 찰스 기도라는 사람의 총에 맞아 부상당하고 9월에 사망했다. 또 하나의 대통령 암살사건은 1901년 9월 제25대 대통령인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도 암살당한 대통령이다. 매킨리는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된 후 대통령재임 2기의 취임식이 끝난 6개월 뒤 뉴욕 버팔로에서 개최된 박람회를 시찰하다가 무정부주의자였던 리온 촐코스(Leon Czolgosz)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미국 대통령의 불운은 계속 이어졌다. 왼쪽부터 워런 하딩(29대), 프랭클린 루즈벨트(32대), 존 F. 케네디(35대) 미국 대통령. 이런 불행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와서 더이상 이어지지 않게 됐다.

미국 대통령의 불운은 계속 이어졌다. 왼쪽부터 워런 하딩(29대), 프랭클린 루즈벨트(32대), 존 F. 케네디(35대) 미국 대통령. 이런 불행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와서 더이상 이어지지 않게 됐다.

192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워런 G. 하딩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정상으로 복귀(Return to Normalcy)’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분골쇄신 선거운동을 한 결과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하딩 정권은 부패와 독직 사건이 계속 일어나서 그는 실망한 끝에 1923년 8월 병으로 사망했다. 암살은 아니었지만, 질병으로 임기중 사망한 것이다.

1940년 제3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5년 4월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보지 못하고 병사했다. 그는 1932년 미국의 대공황이 극심했을 때 제30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미국의 경제를 복구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1940년 제3선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194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제4선에 당선, 그의 임기가 막 시작했을 때 사망한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경제공항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뉴딜(New Deal) 정책으로 미국의 빈부의 격차를 없애고, 부익부 빈익빈으로 이어지는 고식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복지국가 제도로 변화시킨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그런 업적에 미국인들은 ‘제4선 대통령’이란 보답을 한 것이다. 4선 당선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민의 여론은 대통령의 임기를 ‘再任’(8년 임기)로 제한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미국 대통령에 제4선까지 당선될 수 있었던 사람은 루즈벨트 한 사람으로 유일하게 됐다.

1960년 대통령 선거 당시의 어떤 에피소드

이렇게 기록하고보니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1960년 대통령 선거 때 생긴 에피소드 하나가 불현듯 생각난다. 그 무렵 나는 켄터키주에서 대학을 마치고 뉴욕 콜럼비아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대통령 선거 유세운동이 한창일 당시에 워싱턴의 조지타운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박동선 씨가 나를 방문했다. 나는 그와 함께 뉴욕시내의 미국식당에 저녁식사를 하러 나갔다. 그 당시 고객을 안내하는 미국사람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됐다. 나는 그 미국인에게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닉슨과 민주당의 케네디 후보 가운데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서슴지 않고 말했다. 닉슨이나 케네디 두 후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동전을 던지면 어느 쪽이 나오든 그냥 결정해서 찍겠다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이나 다름없이 두 후보는 정책면에서나 혹은 선거연설에서나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누가 당선돼도 상관없다는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 대통령 선거는 열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닉슨과 케네디 후보는 텔레비전에서 공개 정책 논쟁(Policy Debate)을 하게 됐다. 우리는 대학의 스피치 강의시간에 디베이트(Debate)를 하는 규칙과 방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미국대통령후보가 텔레비전 앞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정책논쟁을 벌인다는 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50년대의 미국은 오늘과 같이 텔레비전이 많이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개인 집에서 TV를 시청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리 한국유학생은 선술집인 바(Bar)에 가서 맥주 한잔을 시켜놓고 텔레비전의 공개토론을 지켜보기로 했다.

1960년의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 뉴욕 콜럼비아대 부근에 있는 맥주 집(Bar)에 모여든 한국유학생은 7~8명에 불과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부통령으로 대통령을 승계하겠다는 닉슨 후보는 의기 당당해 보였다. 그 반면에 메사추세츠 주의 연방 상원의원으로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미국의 정치문화를 바꿔놓은 케네디 후보는 매우 참신한 이미지를 보였다. 닉슨은 구세대 사람을 대표하고 있었으며 귀족스타일 정치가라면, 케네디는 일반대중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해 주는 민중의 대통령으로 영상에 비쳐졌다. 그 후 닉슨은 ‘부자들의 가난한 대통령’이라고 낙인이 찍히고, 케네디는 ‘가난한 사람들의 부자 대통령’이라는 말도 나왔다.

케네디는 보스턴 특유의 엑센트로 매우 논리적이고 조리 있게 토론을 전개했다. 닉슨은 냉전시대의 반공 투사와 같이 냉전주의자요 대소 강경론자와 같이 보였다. 특히 미국의 대 쿠바 정책에 관한 토론을 할 때 닉슨은 매우 강경한 논조를 전개하며 쿠바의 카스트로는 제거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반면에 민주당의 케네디 후보는 온건론자로서 미국의 대 쿠바정책은 카스트로 정권을 인정하고 대화와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전개된 TV 논쟁에서 케네디는 평화주의자와 같이 보였고, 닉슨은 전쟁을 불사하는 호전주의자의 이미지를 미국 국민의 마음속에 심어주었다.

닉슨과 케네디 두 후보의 정책토론이 끝나고 우리 한국유학생은 누가 승리했는지 궁금했다. 7~8명중 대부분인 5명은 케네디 후보가 디베이트에서 승리했다고 말하는데 두 학생은 닉슨이 승리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들은 닉슨을 선호하는 이유로 그가 반공주의자이며 또 미국의 강경 일변도의 對共 정책이 좋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가 선호하는 정책과 두 후보가 토론한 내용을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누가 이겼는지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주관적 판단 때문에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오판하는 때도 종종 있다는 것을 이 TV 대선 논쟁을 지켜보면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 대통령 연구의 학문적 진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연구도 1960년에 비하면 오늘날에는 상당히 많이 발전했다. 1950년 대 까지만 해도 연구결과는 대부분 전기와 역사적인 서술이었다. 그러나 심리분석학적 연구방법론의 발전으로 대통령의 중요한 정책결정 당시의 심리학적 분석이 가능해짐에 따라, 대통령의 성격과 인성을 전적으로 엿볼 수 있는 새로운 연구가 진전됐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존 케네디는 적은 표 차이로 제3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그가 3년 뒤인 1963년 11월 텍사스주 달라스에서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케네디 암살의 범인은 리 하베이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라는 사람인데 그는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그는 구소련에도 갔다온 사람이기 때문에 소련의 첩자라고 의심도 받았다. 또 미국내의 범죄집단(마피아)의 음모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오스왈드는 그에 대한 공개재판도 열리기 전에 암살자의 총에 맞아 사망했기 때문에 오스왈드가 케네디를 암살한 정확한 동기를 알 수 없었다. 케네디 암살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정치적·역사적 사건이다.

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 미국의 학자들은 양키들의 고향인 뉴잉글랜드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더욱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 출신 대통령의 전기도 많이 나왔다. 그러고보니 내가 뉴잉글랜드에 와서 산지도 벌서 반세기가 넘었다. 이와 같이 해리슨 대통령이 취임한지 한 달 만에 폐렴으로 사망한 후 120년 동안 20년을 주기적으로 미국 대통령의 신변에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1960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가 암살자의 손에 비운의 객이 된지 20년이 지난 1980년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 3월 존 힝클리(John Hinckley, Jr.)의 총에 맞아서 부상은 입었으나 다행히 사망하지는 않았다. 그는 69세의 최고령으로 당선됐기 때문에 해리슨 대통령의 기록을 깨고, 새 기록을 남긴 것이다. 따라서 해리슨 대통령의 불상사 이후 레이건 대통령의 불상사로 ‘미국 대통령 20년 주기 불운설’은 일단 종식됐다고 볼 수 있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조지 부시 대통령은 2001년 9·11 테러 폭격사건으로 워싱턴의 국방부 빌딩이 폭격 당하고 세계무역센터가 폭파됐을 뿐만 아니라 3천여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국가적 불운’을 맞았지만, 대통령 자신에게는 불상사가 없었다. 해리슨의 불상사와 같은 대통령의 불상사는 레이건 대통령 시대에 이미 끝났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계속>

회고록 (44) 학자로서의 성취의 시간들 … 잊을 수 없는 두 가지 에피소드

인디애나대에서의 5년간 (1965~70)의 교수생활은 나의 개인적인 성장 면에서나 또 나의 전문직 수행에 있어서도 하나의 시금석이 됐다. 그 당시에는 개인용 컴퓨터(PC)가 없었기 때문에 매뉴얼 타자기 혹은 전기 타이프 라이터로 논문을 쳐서 콜럼비아대 대학원에 제출해야 했다. 그렇게 늦게나마 박사학위 논문을 끝마칠 수 있었던 것이 학자생활을 출발하는 데 초석이 됐다. 또한 이 시기에 우리집의 둘째 딸이 블루밍턴에서 출생했고, 또 나의 처 정현용은 인디애나 대학원에서 도서관학 석사학위를 받은 것도 무엇보다 뜻 깊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인디애나대에서 가르칠 때 월남전이 확대돼 대학생들의 군복무 면제가 없어지고 이들도 증집대상이 됐다. 때문에 대학생들 사이에 월남전 반대시위가 더욱 확대 됐으며, 이로 인해 사회적 혼란도 증가했다. 나는 월남전에 관한 특강을 많이 했는데 「현대아시아의 문제 (Contemporary Problems of Asia)」의 강의에는 한 학기에 100여명의 학생들이 등록할 정도였다. 내가 미국 정부의 아시아에 대한 정책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월남문제에 관한 강의시간에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월남전을 반대하는 여론이 조성됐다. 나는 이들 미국 대학생들이 미국정부의 아시아정책을 왜 그렇게 열렬하게 반대하는지 그들의 의견을 직접 듣고 싶었다. 자연히 토론이 전개됐다.

월남전 반대하는 학생들과 토론

대부분의 학생들은 월남전을 일으킨 것은 월맹이 아니라 미국이라고 말했다. 나의 입장은 월남의 게릴라들은 월맹(North Vietnam)에서 내려온 첩자들이 아니라 월남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베트콩이 월남정부를 타도하고 공산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이 그들의 목표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월남에서 토지개혁과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더 많은 젊은이들이 월남정부를 전복시키는 베트콩 운동에 동참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그와 같은 사회개혁을 막는 것은 월남의 지주와 지배계급이 아니라 그들의 후원자인 미국이기 때문에 월남의 개혁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었다. 아래로부터 시작하는 사회개혁이냐 아니면 위로부터 즉 상층 사회로부터 시작하는 개혁이냐가 대학생들의 관심사였다.

나의 분석은 ‘워싱턴의 고위급 관료와 정책결정자들은 월남에서 베트콩을 소탕하고 토지개혁을 시작해 소작농민이 자기들 자신의 토지(자영업용 토지)가 있고, 또 생활수준이 향상되면 베트콩이 농촌에 침투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정리됐다. 그러나 사회개혁이나 농촌의 토지를 빈농에게 분배하는 것보다 월남에 무력을 증강하고 군사원조를 증가하는 것이 베트남전에 승리할 수 있다는 의견이 정책 결정자 내부에서 우세해짐에 따라 월남전은 더욱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호치민이 이끌고 있는 월맹군이 혁명으로 승리했다.

월남전은 어느 면에서 중국대륙에서 국민당 정부가 자본주의로 부패했기 때문에 공산당의 사회혁명 운동을 막지 못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보고 분석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 그 당시 워싱턴의 시각은 월남의 현지상황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으며 현지의 상황판단에 오류가 있었다. 이런 미국의 잘못된 정세 판단에 따라 월남전은 월맹의 승리로 이어졌던 것이며, 미국은 결국 패배당하고 후퇴를 거듭했으며 월남에서 철수 하는 수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미군 장교들 대상으로 특강하기도

월남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에 나는 종종 특강을 했다. 인디애나폴리스 북방에는 미육군부관학교(U. S. Army Adjutant General School)과 국방정보학교 (U. S. Defense Information School) 가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나는 매년 특강을 했다. 부관학교는 주로 월남에 가서 사무직에 종사하는 장교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군사학교였다. 한 클라스에 40~50명의 위관급 장교들과 극소수의 영관급 장교들이 월남전에 파견되기 전에 교육을 받는 곳이었다. 이들은 주로 행정업무를 교육받고 현지에 파견되는 장교들이다.

미군 국방 정보학교 특강에 대한 공로패 - 1967년 8월 15일에 받았다.

미군 국방 정보학교 특강에 대한 공로패 – 1967년 8월 15일에 받았다.

대부분의 정훈장교와 정보분석장교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장교로서 ROTC 출신이 많았다. 나의 강의는 주로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국제관계를 분석해서 월남에 대한 정훈장교들의 상식을 높이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나의 특강은 대학원 학생들의 수준으로 진행됐다. 정훈장교들이 알고 싶어한 것은 중국의 영향력과 중국의 영향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였다. 내가 블루밍턴의 인디애나대에서 동남아시아의 국제관계를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들은 매우 흥미 있게 배웠다고 강의를 평가했다. 그 때문에 국방정보학교는 나에게 감사패를 증정하기도 했다. 1967년 8월 15일이었다.

인디애나대에서 가르칠 때 잊지 못할 일 한 가지가 있다. 바로 한국기자들의 방문이었다. 신방과의 프로이드 알판 (Floyd Arpan) 교수는 국무성과의 계약으로 미국에 방문하는 한국인 저널리스트를 접대하고 또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주한 미국대사관의 문정관이 선발해 미국에 보내는 한국인 저널리스트(주로 KBS와 MBC에 근무하는 저널리스트) 2~3명을 영접하고, 이들을 다른 국가의 저널리스트들과 함께 10여명 규모로 트레이닝(교육) 시키는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경제적인 부담은 미국정부 국무성에서 지불했다. 저널리스트들은 인디애나대가 소재한 블루밍턴에 와서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을 일주일 받고 2~3명씩 조를 만들어 각 도시와 지역을 10여일 시찰하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을 관광하는 프로그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알판 교수는 우리 부부에게 한국 기자를 초대해서 점심 혹은 저녁을 대접해 주기를 기대했다. 나의 처는 인디애나 대학원에서 도서관학으로 석사학위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녁 식사는 주로 중국식당에 나가서 함께 먹고 집에 와서 식후 과일을 먹는데 약주를 좋아 하는 신문기자들은 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스카치를 한 병씩 사다 놓고 대접했다. 신문기자들은 대부분이 술을 많이 마시기 때문에 술에 취해 다음날 일어나서 그날 프로그램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서 알판 교수는 우리 집에서 너무 후하게 식사와 술대접을 해서 한국인 기자들을 스포일(나쁜길) 시켰다고 조롱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게 후하게 대접하는 게 한국의 따뜻한 정의 문화임을 알판 교수는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딸 잘 가르쳤다” 찾아온 어떤 학부형

인디애나대 시절과 관련, 또 하나 아직까지도 기억하는 일이 있다. 어느날 인디애나폴리스 (인디애나 주의 수도)의 생명보험회사에 중역으로 근무하는 학부형이 나를 찾아 왔다. 나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고 물었다. 그는 나의 연구실에 들어와서 자기의 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기 딸 주리는 매우 착한 아이였는데 엄마가 암으로 사망한 후 방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국제정치 원론을 배운 후 아주 달라졌다는 것이다. 나도 기억하는 여대생이었다.

그녀는 재능 있는 학생이었다. 그런 그녀가 ‘텀페이퍼’(과제물)를 작성할 때 매우 힘들어 했기 때문에 나는 조원도 해 주고, 또 무슨 책을 보라는 말도 했다. 또 “너는 더욱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왜 활용하지 않느냐”라고 용기를 북돋워주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용기를 내서 매우 훌륭한 과제물을 작성해 ‘A’ 학점을 받았다. 인디애나 대학 학부에 들어온 후 처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졸업한 후 취업을 했는데 미국의 유명한 시사 주간지 <타임>에 취직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 내가 그의 딸을 도와주고 격려해 준 덕택이라고 하면서 점심에 초대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시간이 맞지 않아 그의 제안을 사양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찾아오겠다고 하면서 인디애나폴리스로 돌아갔다. 인디애나대에서 가르칠 때 있었던 매우 뜻 깊은 에피소드의 하나다.

<계속>

회고록 (43) 동양인 교수가 돼 ‘아시아 문제’를 가르치다

내가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2년간 근무하면서 박사학위 논문을 끝마칠 때쯤인 1964년도였다. 미국본토에 있는 여러 대학에 교수직을 구하는 지원서를 보냈다.

때 마침 캔사스주립대(Kansas State University)에서 인터뷰를 하러 오라는 편지가 왔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캔사스주립대까지 왕복 비행기 표도 보내왔기 때문에 나는 하와이주의 수도 호놀룰루에서 캔사스주립대까지 인터뷰를 하러 갔다. 매우 친절하고 융숭한 대접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꼭 캔사스주립대에 와서 중국정치와 동아시아 국제정치를 담당해 가르쳐주기를 희망했다. 캔사스주립대에서 가르치던 푸링샤임 교수가 5년 동안 가르치는 동안 박사학위 논문을 끝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테뉴어(Tenure, 종신 교수직)를 받지 못하고 떠나게 된 것이다. 나는 하와이로 돌아가서 나의 처 정현용과 상의한 후 결정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하와이로 돌아왔다.

캔사스주립대와 인디애나대 사이에서

그즈음 미국 중서부에 있는 인디애나주립대(Indiana University)에서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 방문교수로 1년 동안 와 있던 시핀 교수(William Siffin)는 필자에게 새로운 뉴스 하나를 알려 주었다. 인디애나대의 정치학과에서 일본과 동아시아정부론을 담당하고 있었던 써튼 교수(Josheph Sutton)가 문리과 대학 학장으로 승진해 「동아시아 정치론」을 가르치는 자리가 하나 났으니 한번 지원 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인디애나대 정치학과 과장에게 나의 이력서(Curriculum Vitae)를 보내면서 추천서도 함께 보내 나를 강력하게 천거했다. 얼마 뒤 인디애나대 정치학과 과장으로부터 임명 통지서가 왔다.

김일평 교수는 이곳 유서깊은 인디애나대학에서 1965년부터 5년 동안 정치학을 강의했다.

김일평 교수는 이곳 유서깊은 인디애나대학에서 1965년부터 5년 동안 정치학을 강의했다.

인디애나대냐 캔사스주립대학이냐 두 대학 중 하나를 선택하고 통보하는 일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나의 처 현용은 인디애나대에는 도서관학 대학원(Graduate School of Library Science)이 있으니 인디애나대에 가서 자기가 희망하는 도서관학 석사학위(M.A.)를 공부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큰딸 애련이는 자기가 석사학위를 공부하는 동안 서울의 어머님에게 석사학위를 끝마치는 2년 동안 키워달라고 부탁하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디애나주의 블루밍턴(Bloomington)에 있는 인디애나대로 가기로 결정했다. 듣기로는 캔사스주립대의 정치학과 교수들이 매우 실망했다고 한다. (인디애나 주에는 주립대학이 여러 개 있는데 인디애나대 Indiana University는 주립이라고 하지 않고 다른 주립대학은 모두 스테이트 대학State University라고 불렀다. 블루밍턴에 있는 주립대학과 테러호트에 있는 인디애나 주립대학을 혼동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시핀 교수의 권유

인디애나대로 갈 수 있었던 데는 윌리엄 시핀 교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필자가 어떻게 시핀 교수를 만났는지를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필자가 홍콩과 대만에 박사학위 자료수집차 갔다가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 돌아왔을 때였다. 인디애나대의 행정학과 교수로 있던 윌리엄 시핀 교수가 1년 안식년 동안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연구하기로 하고 지난 가을부터 와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그가 내게 다가와 점심이나 함께 하자고 말을 건넸다. 그런데 점심을 함께 하던 중 시핀 교수가 나의 박사학위 논문이 언제쯤 끝날 것이냐고 관심을 갖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1년 이내에 끝마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디애나 블루밍턴에 있는 인디애나대에서 동아시아 담당 교수를 구하고 있으니 한번 응모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말했다. 그 이유인즉 이러했다. 일본을 전공한 조세프 써튼 교수가 일본과 중국의 정치를 오랫동안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는 가을 학기부터 인디애나대 문리과대학의 학장으로 보직 임명됐기 때문에 가을 학기부터 동아시아의 정치와 외교를 가르치는 자리가 하나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원한다면 시핀 교수 자신이 강력하게 추천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캔사스주립대로 가느냐 아니면 인디애나주립대학으로 가느냐의 선택 기로에 놓이게 됐다. 캔사스대에는 도서관 대학원(Graduate School of Library Science)이 없었으며 또 캔사스대학 부근에도 도서관학 대학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블루밍턴에 있는 인디애나대를 선택했다. 때마침 인대애나대의 정치학과 과장 월터 라베스 교수가 일본에 출장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렀다 가기로 했기 때문에 호놀룰루에서 나를 현지 인터뷰한 후 조교수로 임명할 수 있다고 했다.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셈이다. 내가 결심한 이유는 무엇보다 나와 결혼한 후 대학원 학업을 중단하고 나의 박사학위 논문준비에 모든 힘을 다해 내조의 공을 세우기 위해서 자기의 직업을 포기하고 있는 나의 처 현용의 도서관학 석사학위를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1965년 가을 학기부터 인디애나대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내도 인디애나대 대학원에 입학해

아내 현용은 인디애나대 대학원(도서관학)에 입학원서를 접수하고 입학 허가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의 집에는 사위의 기쁜 소식을 알려 드리고 출생한지 다섯달밖에 안 된 첫째 딸 애련(Irene)이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자기는 인디애나대의 도서관학 대학원의 석사학위를 공부하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학위가 끝날 때까지 애련이를 키워주시겠다는 어머님의 사랑에 너무도 감격해 눈물을 쏟아냈다. 아내도 인디애나대 대학원으로부터 곧 입학 허가를 받았다.

인디애나대는 먼로 카운티 블루밍턴에 위치해있다. 자연친화적인 캠퍼스는 미국 대학들 가운데서도 특히 빼어나다.

인디애나대는 먼로 카운티 블루밍턴에 위치해있다. 자연친화적인 캠퍼스는 미국 대학들 가운데서도 특히 빼어나다.

블루밍턴에 있는 인디애나대는 중서부 10개 대학(Midwest Big 10) 중에서는 제일 아름다운 캠퍼스가 있는 대학이다. 중서부의 10대학은 중서부의 큰 대학이 미국식 축구경기(Football Game)를 하는 하나의 리그이기도 하다. 내가 1965년 가을학기부터 인디애나 대학의 정치학과에서 가르치기로 결정되자, 아내 역시 1965년 가을학기부터 인디애나대 대학원에서 도서관학 석사학위 (M. A.)를 받을 수 있게 입학수속을 마쳤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또 한 명의 가족 소식이 전해졌다. 하와이에서 비행기를 타고 인디애나로 오는 여행 중 둘째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됐던 것이다.

우리는 블루밍턴에 무사히 도착해 미리 예약해 놓은 교수 아파트에 짐을 풀고 새학기를 맞이할 준비에 바쁘게 지냈다. 아내 정현용은 대학원 수업등록을 다 끝마쳤고, 나는 강의준비를 시작했다. 인디애나대에 재직하는 교수 부인은 등록금이 면제 되는 시대였다. 우리는 매우 바쁘고 또 즐겁게 인디애나대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둘째 아이 금련 (Kate)를 임신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첫째 딸 애련이를 한국에서 데려오기로 했다. 동생이 출생하기 전에 엄마 아빠의 곁으로 와서 사랑을 듬뿍 받으면 동생에 대한 사랑도 생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학원 공부와 가르치는 일 때문에 아버지 노릇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너무도 미안하게 느꼈다.

인디애나 대학에서 가르친 5년 동안(1965-1970)은 매우 바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때 마침 미국정부는 월남전쟁을 확대해 대학생도 징집돼 군복무 과정에서 월남전에 파견하기도 했기 때문에 각 대학의 젊은 학생들은 월남전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반전운동은 중서부의 각 대학에도 확산되기 시작했다.

반전 분위기 속에서 ‘아시아 문제’를 강의

인디애나대 정치학과에서 내가 담당했던 과목 중에 「현대 아시아의 여러 문제(Contemporary Problems of Asia)」라는 과목이 있었다. 본래는 문리과대학 학장이 된 써튼 교수가 가르치던 과목이었다.

원래 미국의 중부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미국외교정책 중 고립주의 정책(Isolationist Policy)을 지지하는 전통이 있었다. 때문에 아시아문제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또 미국의 외교정책의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고 그들은 믿고 있었다. 미국은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도 말고 또 국제관계에서는 고립주의 정책을 선호했다. 따라서 「현대 아시아의 여러 문제」라는 과목은 하나의 교양과목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해 초강대국이 됐기 때문에, 미국은 초강대국으로서의 국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또 아시아의 여러 가지 정치문제에도 개입하게 된 것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즉, 중서부 미국 대학생들에게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의 여러 문제를 설명하고 미국의 역할을 강조하는 과목이었던 셈이다. 월남전쟁이 최고도에 달했을 때인 1965년에는 100여명의 학생이 등록했다. 그리고 미국의 젊은이들이 왜 월남전에 가서 싸워야하는지 심각한 토론이 전개된 날도 있었다. 그리고 인디애나대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월남전 개입을 반대하고 있었다.

인디애나 대학에서 5년 동안 국제정치와 동아시아 정치를 가르친 경험은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콜럼비아대 대학원 시절부터 한국전쟁에 관한 특강은 여러 번 해 보았지만 교수직을 임명받고 한 학기 동안의 강의준비를 하고 100여명의 학생이 등록한 과목의 시험점수를 결정하는 교수직은 처음 해 보는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반응도 궁금했다. 매우 좋았던 것은 동아시아의 정치를 미국 교수로부터 강의 받는 것보다 동양인 교수에게서 직접 배운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실감이 더 컸던 것 같다. 미국의 중서부 지역의 학생들은 뉴욕을 비롯한 동부의 학생들과 비교하면 매우 보수적이고 마치 동양사회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이 교수와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반드시 지키는 것이 나에게는 매우 이색적이었다. 내가 뉴욕에서 5~6년을 지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처음 가르치는 국제정치와 동아시아 정치에 등록한 학생은 120명이었기 때문에 중간시험과 학기말 시험을 채점하고 또 학기말 리포트(Term Paper)를 하나하나 다 읽어가면서 코멘트를 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시험 점수를 매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가르치기 시작한 초보자에게는 더욱 벅차고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과목에 등록한 학생이 50명이 넘으면 조교를 한 명씩 배당 받았기 때문에 조금 안도의 숨을 쉴 수는 있었다.

조교는 대부분 정치학과의 대학원생으로 석사학위를 끝마치고 박사학위 과정에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대학원 학생들이었다. 조교에게는 등록금이 면제되고 생활비도 지급되기 때문에 조교수의 월급이나 조교의 월급은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조교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내가 가르치는 과목의 학생들의 시험점수를 매길 때 조교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교수 생활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이러한 조교의 도움도 점차 감소돼 갔다.

<계속>

회고록 (42) 아내 정현용과 자매들 이야기 … 레어드 선교사가 책으로 소개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연구생활을 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나왔기 때문에, 이야기가 조금 겹치는 부분은 있지만 아내 정현용을 비롯해 가족과 관련된 내용을 잠시 더 소개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정태시 총장의 장녀인 정현용은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문학 서적이 필요하다면 내가 사서 아버님(정태시 총장) 편에 보내 주기도 했다고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정현용은 대학 친구들에게 나에 대해 펜팔(서로 편지 쓰며 생각을 나누는 친구)이라고 소개했다. 펜팔로 시작해 몇 년 동안 연애편지를 쓰고 난 뒤, 그녀가 뉴욕주립대에 유학 오면서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연애를 할 수 있었다. 뉴욕시내의 극장구경도 많이 갔으며 또 박물관도 관람했다. 그런 연애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1963년 하와이로 가기 전에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Riverside Church)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 정현용의 여자 형제는 현용을 포함해 모두 다섯이었다. 그들 다섯 자매에 대한 일화도 없을 수 없었다. 그 중 미국선교사 에스터 레이어드 선생이 기록한 책을 여기 소개한다.

레어드 선교사가 쓴 자매 이야기

원주에 감리교 선교사로 나와 있던 에스터 레어드 선생은 정현용과 네 동생 즉 이들 다섯 자매의 어린시절 사진을 주제로 『The Five Little Chungs』(by Ester J. Laird) 라는 책자의 원고를 집필한 후 작고했다. 레어드 선교사의 전기 『한국을 위해 몸바친 나 애시덕 선교사』를 집필한 최종수 목사는 영문으로 된 책자를 그대로 나 선생 전기에 포함시켰다. 그는 이 책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1982년 여름 나 애시덕 선생님에 관한 자료를 얻기 위해 선생님의 고향인 오하이오 주 훼어헤븐(Fairhaven)에 갔을 때, 선생님의 고향에서 가까운 캠든이라는 곳에 살고 있던 여동생 베라(Mrs. Vera Booker)를 만날 수 있었다. 이 때 베라가 언니 에스터의 원고라고 하면서 이 遺稿를 주기에 가져왔다.”

선교사 에스터 레어드 여사가 정현용 자매를 모델로 쓴 책. 정태시 선생의 가족사진을 표지 모델로 했다.

선교사 에스터 레어드 여사가 정현용 자매를 모델로 쓴 책. 정태시 선생의 가족사진을 표지 모델로 했다.

『The Five Little Chungs』라는 영문 원고는 1952년경에 쓴 것으로 나 선생님이 손수 타자기로 친 원고였다. 선생님 자신은 원고 쓴 날짜를 적지 않았으나, 이 이야기에 넣을 삽화를 그려준 마리 쇼안(Marie Shawan)이라는 분이 그림을 그린 뒤 자기 이름을 서명하는 동시에 연도를 ‘52’ 라고 적었다.

그런데 이 책의 표지에 실은 정태시 선생의 가족사진에 대해 정현용은 6·25 전쟁이 나기 직전인 1950년 봄 4월 경에 강원도 원주의 간재에 소풍 갔을 때 찍은 사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진 필름을 현상(develop)하지 않고 갖고 있다가 6·25 동란 중 미국에 돌아가서 현상했다고 하며 또 『The Five Little Chungs』의 원고를 쓰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선생은 장녀인 현용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서 경자로 하고, 둘째 딸은 명자, 셋째 딸은 은자, 넷째 딸은 현자 등 모두 다 ‘子’를 돌림자로 사용했다. 나 선생은 원고를 1950년에 쓰기 시작해서 1952년에 끝마치고 마리 쇼안 (Marie Shawan)에게 삽화를 부탁한 것이라고 정현용은 생각했다.

정태시 선생 가족은 1950년 6월 25일 한국동란이 일어난 직후인 6월 29일 처남이 육군 대령으로 복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용 트럭으로 충주로 남하했다. 이후 戰勢가 더욱 나빠지는 바람에 이들 가족은 부산을 거처 거제도로 내려갔다. 그 뒤 다시 부산에 와서 살면서 부산에서 이화여중에 입학했다가 전쟁이 끝난 후 서울에 올라와서 정착한 후 이화여고를 거쳐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정현용의 말에 따르면,『The Five Little Chungs』의 내용은 장녀 정현용부터 5녀 정혜용에 이르기까지 다섯 형제를 소개하면서 한국의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문화를 미국의 아이들에게 소개하는 책이라고 한다. 레어드 선교사의 전기를 쓴 최종수 목사 역시 이 책 속의 이야기가 정 선생 댁 다섯 자매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레어드 선교사가 쓴 이 책은 정 선생님의 가정생활을 통해 우리나라 세시풍속과 예의범절, 역사와 문화를 미국사람들에게 재미있게 소개하는 데 의미를 뒀다고 볼 수 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정 선생을 두고 친구들이 ‘정태시 선생은 딸 부자’라고 놀려 주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정 선생은 딸 다섯을 모두 이화여중, 이화여고, 그리고 이화여대학에 보냈다. 그런 사연이 있어서인지 이화여대의 김옥길 총장은 이화여대를 사랑하고 빛내준 정태시 선생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자매들이 걸어온 길

둘째 명자는 이화여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는데, 그녀는 수재라는 말을 듣곤 했다. 아마도 그의 아버지의 천재적 머리를 닮은 것 아니냐고 가까운 사람들은 농담삼아 말하곤 했다. 그녀는 이화여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미국의 뉴욕주립대에 와서 1년간 영어를 더 배운 후 뉴저지주립대인 럿거스대(Rutgers University) 에 진학해 도서관학으로 석사학위를 끝마치고 도서관에서 근무하다가 유종수 박사와 결혼했다. 그는 전북의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 상과대학에서 장학금으로 공부했던 인물이다.

유 박사는 뉴욕 빙햄턴에 있는 뉴욕주립대 경제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캐나다의 국립대학인 알고마대서 교수생활을 사반세기 동안 했다. 유종수 박사는 동생이 3명 있는데 다음 동생 유종근은 김대중 대통령의 경제특보도 했고 또 전라북도 도지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의 형 종수는 은퇴한 후에는 캐나다의 수도 토론토 부근에서 살고 있다.

셋째 딸 은자는 나 애시덕 선생이 이름을 혼동해서 첫째 딸로 착각해 그의 책에는 첫째 딸로 기록돼 있다. 은자는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와서 펜실베니아주립대 (Pennsylvania State Univesity) 대학원에서 스피치를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펜 스테이트 대학에 가서 스피치를 전공하게 된 것은 이승만 박사의 고문이었으며 영문연설을 집필하는 스피치 라이터였든 로버트 오리버(Robert Oliver) 박사의 영향이 컸던 탓이다. 정태시 선생은 세계교육자 대회에 참석했을 때 오리버 교수를 만났다.

오리버 교수는 이승만 박사의 고문인 동시에 스피치 라이터(Speech Writer)라는 직책으로 이승만 박사의 모든 스피치를 영문으로 작성했던 인물이다. 그는 미국에서도 알려진 스피치 학자이기 때문에 미국 스피치 학회의 회장도 역임했다. 또한 그는 미국스피치학회에서 발행하는 <긴요한 스피치(Vital Speech)> 라는 격주간지에 이승만 박사의 3·1절 스피치 혹은 8·15 스피치 등 대통령의 모든 스피치를 영문으로 작성하고 또 스피치 학회 기관지에 실었던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 그 저널을 대학도서관에서 종종 읽었으며, 그 덕분에 스피치를 잘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정현용의 자매. 오른쪽에서부터 정혜용, 정현용, 정경자, 정명자, 정은용 (2010).

정현용의 자매. 오른쪽에서부터 정혜용, 정현용, 정경자, 정명자, 정은용 (2010).

넷째 딸 은용 역시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영양학과에 진학해 영양학을 전공했다. 미국에 유학을 와 뉴저지주립대인 럿거스대(Rutgers State University of New Jersey) 에서 영양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 Ph. D.)를 받았다. 그는 뉴욕시의 연구소에서 5년간의 연구결과가 매우 좋아서 미국 국무부(U.S. Department of State)의 경제원조처(U.S. Agency of International Development) (AID)에서 전문요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다섯째 혜용은 이화여대 아동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코네티컷주립대(University of Connecticut)의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서부의 유타주에서 연방정부의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다음 사진은 2010년 6월 3일 나의 8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이다. 현용의 다섯 자매가 모두 같이 사진을 찍었다.

장녀의 진로와 선택

한편 우리의 장녀 애련이는 한국에 계신 할머니 품에서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잘 자라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하와이에서 2년간의 연구임무를 마치고 인디애나 브루밍턴에 있는 인디애나대(Indiana University)에서 동아시아 정치를 담당하는 교수로 채용됐다. 나는 캔사스주립대서도 초빙하겠다는 초청장을 받았는데 캔사스주립대에는 도서관학 대학원(Graduate School of Library Science)이 없었기 때문에 인디애나 대학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아내 현용이 도서관학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했던 게 이유다.

현용은 인디애나대에서 2년 동안 도서관학으로 석사학위를 끝마치고 정식으로 도서관에서 전문직으로 일할 수 있는 자격증을 받았다. 그리고 애련이도 4세 때 한국에서 돌아와서 인디애나 주 브루밍턴에 있는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애련이는 브루밍턴의 중학교에 다니다가 내가 커네티컷주립대로 옮기는 바람에 스토어스(Storrs, Connecticut)에 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커네티컷주립대 부설 고등학교(E. O. Smith High School)를 졸업했다.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 국무부 장관이 졸업한 웰스리대(Wellesley College)의 영문학과 에 입학해 4년간 영문학을 전공하고 졸업했다.

우리의 장녀 애련이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1964).

우리의 장녀 애련이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1964).

큰 딸 애련이는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 영문학과에서 창작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작가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부총장의 연설문을 작성하는 보좌관으로 채용됐다. 큰 딸은 버클리대에서 특수프로젝트로 카네기재단에 연구기금을 신청을 해 1억2천만 달러($120 million) 이상의 보조금을 받아낸 공로를 인정받아서 버클리대 부총장보(Assistant Vice Chancellor)로 일약 승진했다.

우리의 손주 ‘타이(Tyrus)’는 재롱이 많고 매우 귀엽게 자라고, 성장이 빨라서 금년 가을이면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다. 지금까지의 유치원은 사립 유치원을 다녔는데 초등학교와 중학교도 사립학교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버클리의 공립학교는 배우는 수준이 매우 낮고, 또 새로 이민 온 소수민족의 아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배우는 수준이 매우 열등하다는 것이다. 남미에서 새로 이민 오는 소수민족의 어린이들의 교육문제는 캘리포니아주의 초등학교뿐만 아니라 뉴욕과 다른 큰 도시에도 큰 문제로 제기되고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나의 외손자 타이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사립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이다. 수업료는 대학수준으로 비쌌다.

<계속>

회고록 (41) 하와이에서 만난 이민 1세대 … ‘미주이민사’ 영감을 얻다

우리가 하와이에 도착한 것은 1963년 가을이었다. 콜럼비아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시험을 다 합격하고 떠났기 때문에 원래 예상과는 달리 두 달이나 늦게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이다. 무엇보다 호놀룰루의 집값이 비싸고 또 생활비는 미국의 본토보다 50%가 더 비싸 우리 부부는 적잖이 놀랐다. 그리하여 우리 부부는 우선 체류할 아파트를 구하기 시작했다.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걸어서 10분 내지 15분 거리에 있는 초라한 아파트 단지를 찾아 갔다. 한국인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아파트 단지에 주로 한국 유학생이나 미국 본토에서 단기간 연수차 온 사람들의 가족들에게 빌려주는 아파트였다. 동서문화센터에 유학생으로 와서 석사학위를 공부하는 학생은 대부분 기숙사에 들어가서 살았으나 결혼한 부부를 위한 아파트는 따로 없었다.

이곳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석사학위 과정에 있는 부부 학생들은 주로 하와이 첫 이민 세대인 선우 씨 가 운영하는 판자촌같은 아파트에 입주해 살고 있었다. 우리도 동서문화센터에서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선우 씨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기로 했다. 방 두 개에 골방같은 응접실 그리고 매우 작은 부엌이 달려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동서문화센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면 아파트는 좋고 더 편리하지만 자동차를 사서 출퇴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생활비가 더욱 비싸게 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1903년 하와이에 도착한 선우 씨

그렇게 해서 우리 두 사람은 선우 씨가 소유한 아파트를 계약하고 2년 동안 살기로 했다. 선우 씨는 1903년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겔릭호로 미국 땅에 들어온 한인 이민자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한인 초대이민자 102명 중의 한사람으로 제물포(인천)에서 일본상선을 타고 일본 나가사키에 가서 미국상선 겔릭호로 갈아타고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런 선우씨와 나는 종종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김일평 교수가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 첫 근무할 때 만난 선우 씨는 바로 이 배(겔릭호)를 타고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사진= 미국 이민사 사진집 『100년을 울린 겔릭호의 고동소리』 중에서

김일평 교수가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 첫 근무할 때 만난 선우 씨는 바로 이 배(겔릭호)를 타고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사진= 미국 이민사 사진집 『100년을 울린 겔릭호의 고동소리』 중에서

선우 씨는 자신의 과거사를 들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내가 매우 관심을 갖고 들어주니 저녁식사가 끝나는 즉시 우리 아파트로 달려와서 자기의 이민 역사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던 것이다. 선우 씨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한국 나이로 18세 되던 해에 조선조 왕실의 경비대 대원모집에 응모해 경비대원이 됐다. 1년 정도 근무한 후 한일합방이 돼 황실의 경비대가 해체됐다고 한다. 그것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기 위해 황실의 한국인 경비대를 모두 해체시킨 것이다. 그는 직장을 잃고 다른 직장을 구하러 다니던 중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자를 구한다는 것을 들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 가서 노동하기로 결심하고 응모했다.

선우 씨가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은 1903년 1월 13일 새벽이었다. 그가 타고 온 배는 미국상선 겔릭호였다. 그 배에는 조선인 102명이 함께 타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도착한 최초의 한인 이민자들이었다. 평안도가 고향인 선우 씨도 그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자무식쟁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경우가 매우 바른 사람이었다. 나는 그와 거의 매일 밤 그가 어떻게 미국에 오게 됐으며 또 어떤 곤경을 극복하고 오늘과 같이 아파트 단지를 소유하게 됐는지 그 경로를 들었다. 그가 고생한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이었다.

1903년 하와이 한 사탕수수밭의 한인 이주민 노동자들. 표정이 밝기만 하다. 1903년 1월부터 1905년 7월까지 하와이에 도착한 한인 노동자들은 7천800여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대부분 사탕수수농장이나 파인애플농장에서 일했다. 사진=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

1903년 하와이 한 사탕수수밭의 한인 이주민 노동자들. 표정이 밝기만 하다. 1903년 1월부터 1905년 7월까지 하와이에 도착한 한인 노동자들은 7천800여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대부분 사탕수수농장이나 파인애플농장에서 일했다. 사진=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

영국의 청교도들이 종교의 탄압을 피해서 상선 ‘메이플라워(Mayflower)’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매사추세츠에 있는 프리머스 록(Plymouth Rock)에 도착한 것과 비슷한 천로역정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미국의 청교도들이 미국대륙에 정착한 역사책은 많은데 왜 한국이민역사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그리고 나의 논문이 끝나고 교수생활을 시작한 후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미국의 한국인 이민사를 반드시 기록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먹게 됐다.

2003년 미주이민 100주년 기념 서적을 만들다

2003년 한국 미주이민 100주년을 맞이했을 때 나는 뉴욕한인회의 위촉을 받고 『대뉴욕 이민 100년사』의 편집위원장이 됐다.『대뉴욕 한인 100년사』 (500 쪽) 와 『Korean-Americans: Past, Present, and Future』(영문판)을 편집해 출판했다. 100년사의 편찬위원장은 김일평, 부위원장은 서진형, 그리고 편찬위원은 하동수, 조종무, 황미광, 송의용 등이었다. 미주이민 100년사는 구하기 힘든 자료와 집필진의 기고문을 모아서 『뉴욕의 한인 100년사』를 잘 정리해 놓았다. 그러나 제본과정에서 누가 결정했는지는 몰라도 보통 책보다 두 배가 되는 화보사이즈로 500여 쪽이 되기 때문에 도서관에 전시할 수는 있지만 개인이 휴대하고 다니며 읽기에는 매우 힘든 책이 됐다.

김일평 교수가 편집위원장이 돼 펴낸 한인 이민 100년사와 관계된 책.

김일평 교수가 편집위원장이 돼 펴낸 한인 이민 100년사와 관계된 책.

반면에 영문으로 된 『Korean-Americans: Past, Present, and Future』는 보통 책 크기(4*6배판)으로 교과서로 사용한 대학도 있었다. 특히 미국의 한인사회에 대해 역사적·인류학적 혹은 사회학적 논문을 집필한 경험과 지적 기반이 있는 젊은 학자가 원고를 집필했기 때문에 『Korean-Americans』이라는 책은 한국인 이민 1세의 자녀들이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을 써야 할 때 좋은 참고 자료가 됐으며, 나아가 미국에서 동아시아 역사는 물론 인류학, 사회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의 교과서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미국도서관학회의 기관지인 <초이스(Choice)> (도서관 학보)지에는 이 책에 대한 서평이 실리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주립대의 잉 교수는 “재미한인사회에 관한 영문 책으로는 제일 잘 편집된 책이다”라고 평가하면서 교과서로 추천했다. 미국의 많은 대학의 도서관에서 주문했다는 소식이 출판사에서 왔다. 매우 기쁜 일이었다.

<계속>

회고록 (40) 개발행정세미나에서 중국공산당 연구 단초를 찾다

우리가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은 1963년 10월 30일이었다. 그것은 6월부터 10월까지 박사학위 예비시험을 준비하고 10월 하순에 콜럼비아대 대학원의 박사학위 최종 종합시험을 통과한 후였기 때문이다. 나는 11월 1일부터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에 출근하기로 돼 있기 때문에 우선 숙소를 구해야 했다. 하와이대 캠퍼스를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침실과 응접실이 달린 아파트를 구했다. 하와이는 겨울이 없고 일 년 내내 봄과 여름과 같은 날씨였기 때문에 난방시설은 따로 필요가 없는 곳이다. 그리고 여름에는 매우 더울 때도 있고, 또 겨울에는 가을 날씨 같이 좀 선선할 때도 있다. 우리 부부는 우선 아파트에 정착한 후 나의 직장인 동서문화센터의 고급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ies)를 찾아갔다.

하와이 도착 이튿날부터 연구소 생활 시작

하와이에 도착한 다음날인 11월 1일부터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연구실이 따로 준비돼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연구를 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 연구소의 사무직원은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근무하고 퇴근한다. 그러나 우리 학자들은 대개 오전 9시에 연구실에 나왔다가 점심식사는 부근의 집에 가서 할 때도 있고 또 오후에는 와이키키 해변에 가서 해수욕을 하며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개발행정의 세미나 구성원은 프린스턴대의 그랜 페이지(Glenn Paige) 교수가 주동이 돼 아침 9시에 세미나를 시작했다. 인도 뉴델리대의 행정학 교수 메논, 파키스탄 정부의 행정차관을 지냈다는 마시 후스만 박사, 대만 정치대학의 행정 대학원 량다풍(梁大鵬) 교수, 그리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의 朴東緖 교수와 그랜 페이지 교수가 차례로 논문을 발표하면 나는 라포투어(Rapporteur) 즉 기록 보관자로서 세미나 토론을 정리 했다.

하와이대에 있는 동서문화센터 전경. 이곳에서 김일평 교수는 중국공산당 연구의 단초를 그려가기 시작한다.

하와이대에 있는 동서문화센터 전경. 이곳에서 김일평 교수는 중국공산당 연구의 단초를 그려가기 시작한다.

대만의 양 교수와 서울대 행정 대학원의 박 교수는 영어가 좀 짧아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두 교수보다 토의참가에는 적극적이지 못했지만 페이지 교수가 서울대 행정대학 창립당시 미국고문단 교수의 일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박동서 교수의 부인은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생이었다. 나의 아내 정현용과는 같은 대학 같은 학과 동문이었기 때문에 서로 매우 가깝게 잘 지낼 수 있었다.

하와이의 개발행정세미나에서 오전의 개발행정(Development Administration) 세미나 시간이 끝나면 나는 도서실에 가서 나의 박사학위 논문준비에 시간을 집중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논문을 무엇에다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논문의 방향도 다르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나는 개발행정세미나에서 배우는 조직이론을 나의 박사학위 논문에 적용해 학위논문을 집필할 수 있겠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랜 페이지 교수와 도크 바네트 교수에게 문의해 보았다. 그랜 페이지 교수는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했으나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자료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막연한 이상론만 전개 했다. 그 반면에 콜럼비아대의 도크 바네트 교수는 내가 적용하려는 조직이론이 과연 중국의 현실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보라고 건의했다. 다시 말하면 이론과 현실의 결합성이 문제로 부상했던 것이다.

나는 개발행정 세미나에서 조직이론을 많이 공부했지만 그와 같은 이론을 적용해 중국의 공산당 조직을 설명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도 검토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조직이론에 대한 책을 좀 더 읽어보기로 했다. 조직이론에서 나의 논문에 적합한 자료가 ‘陳誠文庫(Chen Ch’eng Documents)’에 포함돼 있는지 검토해 보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직이론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한다는 것은 조직이론을 응용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조직이론을 억지궁상으로 뜯어 맞춰 보려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강서시대의 행정구역과 중앙의 행정지시가 조직말단의 행정기구에 전달되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다.

‘陳誠文庫(Chen Ch’eng Documents)’를 만나러 대만으로

1960년대의 박사학위논문을 읽어보면 정치행정 분야의 대부분의 논문은 자료를 이론의 틀에 맞춰 놓고 집필했기 때문에 좀 어색한 논문이라고 지적받는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바네트 교수는 나의 논문을 이론의 틀에다 일차 자료를 맞춰 넣으려고 애쓰지 말고 우선 그와 같은 조직이론이 강서시대의 행정과 정치조직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 검토한 후에 논문을 집필하라는 조언을 주었다. 그의 조언대로 나는 우선 개발행정 세미나에서 배운 조직이론을 어떻게 중국공산당 조직에 적용해 논문을 쓸 수 있겠는지 검토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서시대의 자료 속에서 조직이론을 적용해 중국공산당의 행정제도를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도 검토해 보기로 했다. 결론은 ‘陳誠文庫’에 수집돼 있는 자료만으로는 매우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하여 강서시대의 ‘中國 소비에트 정부’의 부주석으로 있었던 장궈타오(張國燾)를 한번 만나서 인터뷰한 후 결정하기로 했다.

장개석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진성 장군은 강서 소비에트 정부를 공격, 그곳에서 중국공산당 기밀문서를 다량 확보했다. 그 문서가 대만으로 옮겨져 '진성문고'로 칭단에 보관되고 있다.

장개석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진성 장군은 강서 소비에트 정부를 공격, 그곳에서 중국공산당 기밀문서를 다량 확보했다. 그 문서가 대만으로 옮겨져 ‘진성문고’로 칭단에 보관되고 있다.

대만 중국정부의 부통령이었던 陣誠 장군이 江西省 공비토벌 사령관으로 ‘강서 소비에트 정부’를 공격했을 때 진 장군은 그곳에서 ‘중국 소비에트 공화국’ 문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문서는 국민당 정부가 중국대륙에서 철수해 대만으로 건너 올 때 함께 대만으로 옮겨졌다. ‘陳誠文庫’ 라는 명칭으로 대북시에서 떨어진 교외인 칭단에 보관되고 있었다. 그와 같은 공산주의 기밀문서를 찾아보기에는 상당한 보안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만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열람할 수 있었다. 나는 1963년 가을 홍콩과 대만에 나의 박사학위 논문 자료수집차 갔을 때 국민당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아서 국민당 정부의 기밀문서 보관소가 있는 칭단에 가서 기밀문서를 열람할 수 있었다. 기밀문서 열람에는 그 당시 대만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부산대에서 가르치고 있던 朴日根 교수의 도움이 컸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서로 자주 연락도 하고, 또 박 교수는 우리 코네티컷주립대의 방문교수로 가족과 함께 와서 2년간 체류하기도 했다.

나는 홍콩에서 한 달 그리고 대만에서 한 달 박사학위 논문자료 수집을 할 때 풀브라이트(Fulbright) 연구장학금을 받았다. 왕복 경비는 물론 체제비용도 함께 포함된 장학금이라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었다.

나의 ‘베러 하프’를 만나게 된 사연

내가 영어 회화를 배울 때 ‘베러 하프(Better Half)’라는 말이 나왔을 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좀처럼 감을 잡지 못했다. 차츰 알게 된 단어이지만 참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처(Better Half)가 된 정현용 박사는 내가 콜럼비아대 대학원에 입학한 후 서신 교환으로 사귄 케이스다. 그래서 그는 나를 펜팔(Pen Pal)이라고 불렀다. 1950년대의 뉴욕에는 한국 유학생 중 남학생의 수는 여학생 수보다 두 배가 넘었기 때문에 연애결혼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정현용은 나의 은사인 정태시 총장이 미국을 방문하실 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영문학 책을 한국에서 구할 수 없었던 1950년대였기 때문에 나에게 편지하면서 영문학 도서를 좀 구해서 보내 달라는 부탁을 종종했다. 나는 열심히 구해서 보냈다. 그 당시에 보낸 영문학 책은 아직도 우리 서재의 책장에서 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신교류를 하게 됐던 것이다. 서로가 ‘펜팔’이 된 셈이다.

정현용은 이화여자중학교와 이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 진학해 영문학을 전공하고 졸업했다. 그리고 미국 유학을 위한 국가고시에 합격한 후 미국유학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 뉴욕주의 뉴 펄즈(New Palz)에 있는 뉴욕주립대에서 입학허가서를 받았으며 또 장학금까지 받았기 때문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미국대학으로부터 장학금(Full Scholarship)을 받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대한교련 사무총장이던 자기 아버님이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교육자대회에 참석했을 때, 같은 분과위원회에 함께 공동사회를 맡은 뉴욕주립대학장이 장학금을 교섭해 주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당시 30세에 가까운 노총각이었던 나는 그녀와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나는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다고 판단해서 즉시 그녀에게 답장을 썼다. 그녀의 아버님이 대한교육연합회 사무총장으로서 교직관계 국제회의에 여러 번 참석하고 뉴욕에 종종 들리게 되면 나는 어김없이 그 어른을 모시고 다니면서 저녁식사도 함께 하고, 또 뉴욕 시내 구경도 시켜드리곤 했다.

1960년대 초 영화「십계(Ten Commandment)」가 처음 상영됐을 때 정 총장님은 뉴요커 호텔에 묵고 계셨다. 동행도 있었지만 내가 직접 찾아가서 정 장님을 모시고 그날 오후에 시작하는 영화 「십계」를 세 시간 동안 관람했다. 그리고 일본식당 ‘사이또’에 모시고 가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 당시(1950년대)에는 한국식당이 뉴욕시에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여행하는 한국인 손님에게는 일본 식당이 제일 인기가 있었다. 일본 식당도 뉴욕시에는 57가에 있는 후지 (Fuji)와 24가에 있는 사이또(Saito) 두 개 밖에 없었다.

<계속>

회고록 (39) ‘박사논문’과 학자의 길을 만든 한국전쟁에 관한 나의 기억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으니 60여 년 전의 일이다. 3년간의 격전이 끝나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한국전쟁 3년 동안 모두 179만 명의 미국 군인이 참전했으며 이 가운데 4만여 명이 전사하고 실종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미국의 대학원에서는 한국전쟁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도 수십 편이 나왔고 또 한국전쟁에 관한 학술서적도 상당수에 달하고 있다. 일반인을 위한 한국전쟁 수기와 회고록도 꽤나 출판됐다.

지난 2007년에 출판된 『가장 추웠던 겨울(The Coldest Winter)』을 저술한 데이비드 할버스탐 (David Halberstam)은 월남전에 관한 책 『제일 훌륭하고 가장 총명한 사람들(The Best and Brightest)』이라는 책을 비롯해서 월남전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저술한 저널리스트다. 그는 또 미국의 퓰리처 저널리즘상을 받은 원로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그의 책 『가장 추웠던 겨울』의 서문에 썼다.

그는 6·25전쟁에 관한 책을 쓰기로 결심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2004년에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에 휴가를 갔다. 그는 한국전쟁에 관한 책을 집필 중이었기 때문에 마이아미 시립 도서관에 가서 한국전쟁에 관한 책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월남전쟁에 관한 책은 88권이나 찾아 볼 수 있었는데 한국전쟁에 관한 책은 단 4권밖에 찾을 수가 없었다고 그는 책 서문에 기록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

한국전쟁은 3년 동안(1950~1953)의 격전 후에 휴전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휴전상태에 있다. 반면 월남전은 10년(1965~1975)이나 넘게 미국이 직접 개입해 싸웠기 때문에 희생자도 많았고 또 참전용사의 숫자도 한국전쟁보다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6·25전쟁은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북한과 중공 그리고 미군과 유엔사령부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을 체결한 전쟁이었다. 미군은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반세기가 넘은 오늘까지 아직도 한국에 계속 주둔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50여 년 동안 전쟁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언제 또 전쟁이 발생할지 모르는, 끝나지 않은 전쟁인 것이다.

그 반면에 월남전은 미국의 패배로 끝났으며, 따라서 미군은 월남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월맹은 남북통일을 이룬, 종료된 전쟁이다. 미국역사에서 미군이 외국전쟁에 개입해 참패를 당한 것은 월남전이 역사상 처음이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한국전쟁은 냉전의 전초역할을 하게 됐으며, 냉전은 20세기 후반에 거의 반세기가 넘게 지속됐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을 비교하면서 미국의 외교정책을 비교하는 강의도 여러 차례 했다. 그러나 미국학생들은 월남전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지만,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회고록의 앞부분에 밝혔듯이 나는 한국육군 연락장교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3년 동안 복무했기 때문에 6·25전쟁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또 학술연구의 구상도 많이 해 보았다. 1957년에 뉴욕의 콜럼비아대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나는 한국전쟁에 관해 박사학위 논문을 쓰겠노라고 나의 지도교수에게 말한 일이 있다. 주임교수는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한 육군장교라는 나의 특수한 사정 때문에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매우 힘들 것이며, 또 한국전쟁에 관한 정부의 비밀문서가 아직 개방되지 않아 박사학위 논문을 쓸 만한 자료를 확보하기도 어려우니 좀 더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충고해 주었다. 그는 대신 한반도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국제정치에 관한 연구가 바람직하다고 권고했다. 그리하여 나는 중공의 정치체제와 소련의 대북한정책 그리고 미국의 대 한반도정책에 관한 비교연구를 할 수 있는 기초연구를 대학원에서 시작한 것이다. 주임교수의 충고는 50여 년이 지난 오늘도 내 기억에는 생생하게 남아있으나 아직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다.

‘북한 노동당 연구’로 첫 북한 관련 논문 발표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는 석사학위 과정을 모두 끝마치면 박사학위 후보자가 되기 위해서 석사학위 논문을 쓰도록 돼 있다. 석사학위 과정의 일환으로 나는 공산권 연구에 관한 대학원 세미나에 등록했다. 동아시아 문제는 제임스 모레이(James Morley) 교수, 소련과 동구권은 헨리 로버트(Henry Roberts) 교수, 중국문제는 마틴 윌버(Martin Wilbur) 교수가 함께 지도를 했다. 박사학위과정의 코스워크를 끝마치고 박사학위 과정에 있는 대학원생 5~6명이 함께 등록했다. 주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데 필요한 자료와 논문테마를 결정하고 매주 2시간 정도의 발표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1948년 조선노동당전당대회 모습. 김일평 교수는 북한 노동당 제4차 전당대회를 테마로 논문을 썼고, 이 논문이 그의 학자적 길을 다지게 됐다.

1948년 조선노동당전당대회 모습. 김일평 교수는 북한 노동당 제4차 전당대회를 테마로 논문을 썼고, 이 논문이 그의 학자적 길을 다지게 됐다.

그 당시 북한의 제4차 노동당 대회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모레이 교수는 북한 노동당의 제4차 전당대회에 관한 세미나 페이퍼를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래서 나는 공산권을 연구하고 있는 대학원생으로서 한번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북한 노동당의 제4차 전당대회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콜럼비아대 동아시아도서관 (East Asian Library)에는 주로 중국, 일본, 한국에 관한 영어로 된 책은 물론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로 된 책과 신문잡지 등을 수집해 보관하고 있었다. 북한의 제4차 노동당대회에 관한 자료는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의 기관지 <노동신문>과 북한 정부의 <민주조선> 그리고 조선노동당의 이론 월간지인 <근로자>를 읽어서 기초자료로 삼았다. 또 일본에서 발행되는 북한관계 자료를 수집해 석사학위 논문을 쓰기로 했다.

이렇게 자료를 수집하고 읽고 분석함으로써 나의 석사학위 논문도 마무리될 수 있었다. 논문심사 위원회에서 모레이 교수는 석사학위 논문의 한 장을 수정 보완해서 아시아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태평양 문제(Pacific Affairs: An International Review of Asia and the Pacific)>이라는 학술지에 기고하라고 조언했다. 나는 나의 석사학위 논문에서 한 장을 뽑아서 <태평양 문제>라는 계간 학술지에 보냈던 것이다. <태평양 문제> 라는 학술지는 1928년부터 뉴욕에 있는 태평양외교연구소(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에서 1년에 4회발행한 학술지다. 미국의 학술연구는 주로 유럽을 중심적으로 연구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의 정치와 역사까지 연구하게 됐다.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언론인들이 힘을 모아서 ‘태평양외교연구소’라는 학술단체를 조직하고 학술지를 발행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태평양 문제>였다.

<태평양 문제>라는 학술지의 주필 겸 편집인 윌리암 홀랜드(William Holland) 교수는 내 논문을 한번 읽어본 후 수정할 부분과 보완할 부분을 지적하며 한 달 이내에 수정 보완해 보내달라는 서신을 보내 왔다. 그리하여 나는 미국 친구와 함께 나의 논문을 수정하고 보완해서 다시 보냈다. 1962년에 발행된 <태평양 문제>지에는 나의 논문 「북한의 제4차 당대회(North Korea’s Fourth Party Congress)」라는 논문이 수록돼 있다. 어찌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한국유학생으로는 처음으로 영문 학술지에 북한에 관한 학술논문을 발표했으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모든 한인학생들은 물론이고 한국정부의 외교관들까지 나의 학술논문을 다 읽어보았다고 말했다. 북한에 관한 학술 논문이 한국전쟁 후 처음으로 미국 학계에 발표된 것이다.

 <태평양문제>와 <계간 중국>에 잇따라 논문 발표

영국 런던의 문화자유협의회(Congress of Cultural Freedom)가 편집하고, 런던대의 아프리카-동양학 대학원(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University of London)에서 발행 되는 학술지 <계간 중국(The China Quarterly)>의 편집장이었던 로더릭 맥파쿠어 (Roderick MacFarquha)는 내게 편지를 보내어 <태평양 문제>에 기고한 「북한의 제4차 당대회」를 매우 흥미 있게 잘 읽었으며, <계간 중국>에서 1962년에 북한에 대한 특집을 출판할 계획이 있는데 기고할 수 있겠냐고 문의해 왔다. 프린스턴대의 그랜 페이지 교수도 기고할 것이며 캘리포니아주립대의 스칼라피노 교수가 특집의 편집을 담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지도교수와 상의한 후 북한의 행정제도에 대해 세미나 페이퍼를 쓰고 있으니 기고하겠다고 회신했다. 그리하여 나의 두 번째 논문 「북한의 행정과 사법구조(Administrative and Judicial Structure in North Korea)」를 저명 학술지에 기고할 수 있었다.「북한의 제4차 당대회와 북한의 행정구조」는 나의 석사학위 논문의 일부라는 사실을 밝혀 놓았다. 미국의 학계에서는 인간관계보다는 자기의 논문을 학술지에 발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이를 계기로 깊이 인식할 수 있었다.

과 . 이 두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김일평 교수는 학자로서 길을 확신하게 됐다고 술회하고 있다.

<계간 중국>과 <태평양 문제>. 이 두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김일평 교수는 학자로서 길을 확신하게 됐다고 술회하고 있다.

프린스턴대의 그랜 페이지 교수가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개최되는 개발행정 세미나에 나를 초빙한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논문이 발표된 무렵의 일이었다. 두 번째 논문은 인디애나 대의 씨핀 교수가 읽어보고 정치학과장 라베스 교수에게 나를 추천해 내가 조교수로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박사학위 논문은 좀 더 새로운 어프로치를 선택해서 집필한다면 대학출판부에서 출판도 하고, 또 미국의 일류대학 교수로도 등용될 수도 있을 것이며, 테뉴어(종신교수직)를 받는 데에도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프린스턴대의 그랜 페이지 교수는 나에게 북한정치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충고를 했다. 그러나 북한의 공산당 역사는 이미 2~3명의 한국 유학생이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캘리포니아주립대의 이정식 씨가 스칼라피노 교수의 지도하에 북한공산주의 연구의 권위자가 됐고, 또 다른 한국 학생도 북한에 대한 석사 혹은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중공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로 생각을 바꿨다. 그 당시에는 박사학위 논문만 쓰고 한국에 빨리 돌아가서 교수가 되는 것도 한 방법이었지만, 그것보다는 미국에서 교수직을 구하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출판해 인정받는다면, 박사학위 과정이 있는 일류대학에서 교수직을 시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나는 내가 관심을 갖고 집필하고 싶었던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 다시 검토해 보기로 결심하고 중공에 관한 연구를 대학원에서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끝마치고 박사학위를 할 당시에 미국 국방장학금(National Defense Education Fellowship)을 신청한 일이 있다. 지도교수와 다른 교수 두 명이 함께 매우 고무적인 추천서를 써 주었고 또 치열한 경쟁 끝에 국방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장학금을 활용해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3년 동안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내가 국방장학금으로 중국과 소련의 대 한반도 정책에 대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은 1958년 석사학위를 받은 직후의 일이다. 나의 석사학위 논문은 1954년의 북한 노동당부터 제4차 당대회까지 북한의 내부 정치와 행정을 주로 다뤘다. 6·25전쟁에 대한 관심과 연구계획은 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자라나고 있었다. 때문에 한국전쟁에 관한 책이 영문으로 출판되면 반드시 구입해 뒀다가 시간 날 때마다 읽었다.

한국전쟁의 최전선, 그리고 히긴스와 올리버

나는 6·25전쟁 때 강원도 화천군 38도선 북방에 있는 한국군 제2군단 사령부의 정보처 브리핑 장교로 복무할 때 체험을 종종 회상하곤 했다. 한국군 참모급 이상의 장교와 미국군 고문단 장교들에게 매일 아침 8:00시에 상황실에 모여서 조회 겸 브리핑을 할 때 북한과 중공군의 현황을 보고하곤 했다. 정례 브리핑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북한과 중공에 관한 <뉴스위크>와 <타임>지 같은 주간지를 읽어야 했고, 또 영문책도 많이 읽을 수 있었다.

올리버 박사의 책. 한국전쟁에 관심을 가졌던 김일평 교수가 두 번째로 접한 관련 영문 저작이다.

올리버 박사의 책. 한국전쟁에 관심을 가졌던 김일평 교수가 두 번째로 접한 관련 영문 저작이다.

하루는 조회 브리핑이 끝나고 나오는데 정보처(G-2) 고문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윌리엄 이너스(William F. Enos) 중령이 포켓북(소책자) 『War in Korea』(1951) 라는 책을 나에게 건네주면서 한번 읽어 보라고 말했다. 그 책은 한국전쟁에 대해 미국의 일간지 <뉴욕 헤럴드 트리뷴(New York Herald Tribune)>의 한국전쟁 특파원으로 한국에 나와 있는 마거릿 히긴스(Marguerite Higgins)라는 종군기자가 쓴 책이었다. 포켓북이니 미국사람들은 3~4 시간이면 다 읽어치운다. 그러나 나는 잘 모르는 영어 단어를 영한사전에서 찾아가면서 천천히 읽었다. 그 책이 한국전쟁에 대하여 내가 읽은 첫 번째 책이었다. 미국인 여기자로서 한국전에 종군해 모든 정성을 다 바쳐서 매우 자세하게 쓴 책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인의 이름을 영문으로 표기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또 한국말을 일정한 규칙 없이 영문화해서 사용했던 책으로 기억한다.

내가 읽은 두 번째 책은 1950년에 출판된 올리버 박사(Robert T. Oliver)의 『한국전쟁은 왜 일어났나?(Why War Came in Korea?)』였다. 이 책은 내 서재의 책장에 아직도 꽂혀 있는데, 나는 그 책을 1950년대에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다. 대학에 다닐 때였지만 매우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이 책은 매우 학술적인 책이었다. 한국전쟁의 역사적인 배경과 전쟁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책이라는 서평도 있었다.

올리버 박사가 이승만 박사의 고문으로 있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편견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저자는 객관적으로 한국전쟁을 분석하고 한국의 입장을 해명하는 데 공을 많이 들였다. 60년이 지난 오늘 다시 읽어보아도 역시 학자의 입장에서 쓴 객관적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부의 학자들은 올리버 박사가 이승만 대통령의 스피치 라이터(Speech Writer)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을 홍보하고 이승만 박사를 위해 미국의회의 로비활동을 많이 한 교수이기 때문에 편견이 많고, 객관적인 학자의 견해가 아니라고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이 있었다.

<계속>

회고록 (38) 잊을 수 없는 콜럼비아 대학원 박사학위 예비시험준비

나는 새벽같이 일찍 일어나서 허드슨(Hudson River) 강변에 있는 리버사이드 드리아브옆의 인도(길)을 따라 30분 내지 한 시간 정도 빠른 걸음으로 산책을 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한 후 아침식사를 끝내고,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콜럼비아대 도서관에 매일 출근했다. 아내 정현용은 자원봉사자가 돼 출근해 교수님들의 4~5세 된 취학 이전의 자녀를 돌보아주는 일을 했다.

법과대학 도서관에서 공부에 몰두

도서관에 틀어박혀 하루에 200~300쪽의 학술 서적을 소화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책이든 처음 한두 장(Chapter)은 매우 힘들게 읽게 되지만 저자의 스타일과 논지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독서의 속도가 빨라지게 된다. 교재는 하루에 한권정도 읽을 수 있었지만 이론서적은 시간이 두 배나 더 걸린다. 그래서 하루 8~10시간을 독서에 몰두하고 나면 저녁식사 후에는 오락 프로그램을 찾아서 피로를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텔레비전을 보든가 아니면 콜럼비아대 근처의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편이다. 때마침 舊소련(러시아)과 미국 사이에 문화교류 협정이 1959년에 체결됨으로서 소련의 영화가 많이 들어오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한 달에 한 두 편의 외국 영화를 감상하면서 독서로 지친 머리를 식혀야 다음 주에도 책을 몇 권씩 독파할 수 있었다.

콜럼비아대 버틀러 중앙도서관의 야경. 김일평 교수는 버틀러 도서관과 콜럼비아 법과대 도서관에서 하루 10시간을 책을 읽으면서 박사학위시험에 대비했다.

3개월 동안 문을 닫아걸고 머리띠를 바짝 조이고 책상 앞에 앉아서 독서한 결과 1963년 10월에 박사학위 종합시험을 보기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전공과목으로는 미국정치, 소련정치, 중국정치로 결정하고, 소련정치는 해자드(John N. Hazard) 교수, 중국정치는 도크 바네트(A. Doak Barnett) 교수, 미국정치는 사무엘 헌팅턴(Samuel P. Huntington) 교수를 주심으로 모셨다. 부심에는 국제정치 분야의 소련 외교정책은 아랙스 달린(Alexander Dallin) 교수 , 동아시아(일본과 중국) 외교정책은 제임스 몰리(James W. Morley) 교수를 모셨다. 다섯 명의 교수가 한자리에 모여서 두 시간 동안 질문을 하면 나는 책에서 읽은 저자들의 견해를 요약해 대답했다. 질문 가운데 가장 답하기 난처한 것은, 그러면 너의 견해는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받은 교육은 암기식 주입 교육이어서, 한 권의 책을 읽고 역사적 사실만 암기하는 방식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암기식 공부는 저자의 견해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좀처럼 적극적으로 제시하기가 어렵다. 사고훈련과 비판훈련이 빈약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저자의 이론을 비판하는 능력은 매우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인 사실을 나열하면 옆의 주임 교수는 자기 자신의 견해는 없냐고 물어본다. 과연 내가 독서를 하면서 내 자신이 좀더 비판적인 생각(Critical Thinking)을 기르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5명의 심사 교수들 앞에서

두 시간 이상의 질문을 받고나니 머리가 터지는 것 같이 아프고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그리고 주임교수가 문밖으로 나가서 기다리면 교수님들이 서로 상의해서 합격과 낙제를 판결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합격하지 못하면 일 년 뒤에 다시 한 번 종합시험을 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나는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 가서 그랜 페이지 교수와 함께 연구교수(Research Associate) 생활을 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하와이로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러니까 낙제가 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10분도 되지 않아 바네트 교수가 들어오라고 나를 불렀다. 그가 5명의 시험관 교수님 앞에서 합격했다고 발표하는 순간, 나는 눈에서 눈물이 핑 돌며 마구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정지되는 것만 같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목매인 목소리로 고맙다는 한마디만 남기고 시험장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달음박질 하듯이 막 뛰어서 집으로 달려왔다. 나의 처 현용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했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합격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우리는 서로 얼싸안았다. 마침내 학자로서의 첫 검증을 마쳤다는 기쁨과 그동안 박사학위 준비에 쏟아 부었던 시간들, 아내의 정성어린 돌봄, 여러 가지 사건과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때의 그 감개무량한 감정을 나누며 매우 기뻐했던 심정은 지금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훗날 한국정부의 외무장관을 지낸 이 아무개 씨도 콜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과정을 공부하다가 낙방하는 바람에 영국 옥스퍼드대로 갔으며, 또 누구누구도 박사학위 종합시험에서 낙방해 뉴욕을 떠났다는 소문이 자자할 때였다. 어찌나 감개무량한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음날부터 하와이로 떠나기 위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콜럼비아 대학원의 박사학위과정 최종 종합시험(General Examination)이 10월 초에 잡혀있었기 때문에 나는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의 고급연구소(Institute of Advanced Studies at East-West Center)의 소장에게 편지를 보내고 박사학위 종합시험을 10월초에 치른 후 11월초부터 근무를 시작하겠다고 전했다. 와이드너 소장은 이런 나의 사정을 이해하고 승낙의 회답을 보내왔다. 그리고 3개월 동안 콜럼비아대 법과대학 도서관에는 아침 8시에 출근하고 저녁 6시에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러니 점심식사 한 시간을 빼고 매일 8시간동안 책을 읽었다. 콜럼비아대 법과대학의 도서관을 많이 이용한 것은 순전히 이곳이 새로 지은 건물이라 냉방 시설이 매우 잘돼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처 현용은 콜럼비아대 부근에서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해서 일을 시작했다.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이었기 때문에 영어회화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우리 부부는 아침 7시 반에 아파트를 떠나서 저녁 6시경에 다시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그날의 뉴스를 캣취업(catch up)한다. 그리고 저녁뉴스를 보고 또 역사적인 다큐멘터리가 있으면 보고 잔다. 그와 같은 생활을 5~6개월 동안 매일 거듭한 후 나는 콜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 예비시험을 패스했다. 박사학위 예비시험은 처음에 실패한 사람은 다시 한 번 더 볼 수 있었는데 일년 이상 준비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하와이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 처음 시험에 합격한 것이 무엇보다 다행한 일이었다.

박사논문 준비 중에 찾아온 새로운 인연

(회고록 28회차에 잠깐 언급했던 내용을 다시 환기하고자 한다.) 내가 1962년에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종합시험을 전부 합격하고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 새로운 인연의 한 끈이 조심스레 맺어지기 시작했다. 프린스턴대에서 한국전쟁의 정책결정이라는 박사학위논문을 끝마치고 미국에서 한국학을 개발하고자 매우 열정적으로 동분서주하고 있었던 그랜 페이지(Glenn Paige) 교수가 나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그는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가 창립됐는데 자신은 1년간 개발정치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해 참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내가 박사학위 예비시험에 합격한 후 자기와 함께 하와이에 가서 개발행정에 대한 세미나에도 참여하고 또 박사학위 논문을 쓸 수 있는 기회도 있을 것이니 함께 하와이로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던 것이다. 나는 매우 흥분했다. 미국에 와서 처음 학계에 직장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집에 가서 나의 처와 상의해 보고 알려주겠다고 약속한 후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달려왔다.

당시 우리는 허드슨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400번지에 살고 있었다. 허드슨 강과, 허드슨 리버사이트 파크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오늘날의 허드슨 리버사이트 파크 크리스토퍼가의 모습.

당시 우리는 허드슨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400번지에 살고 있었다. 허드슨 강과, 허드슨 리버사이트 파크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오늘날의 허드슨 리버사이트 파크 크리스토퍼가의 모습.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리버사이드 드라이브(Riverside Drive) 400 번지였다. 8층에 살았기 때문에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허드슨 강을 따라 펼쳐져 있는 리버사이드 파크(강변공원)는 아침저녁으로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강변공원에는 벽에 대고 정구연습을 할 수 있는 오락시설도 갖춰져 있었다. 이와 같이 좋은 환경을 버리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솔직히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내와 상의하며 대화를 나눈 결과, 우리는 하나의 모험이기는 하지만 또 미래의 도약을 위해 모험 삼아 하와이로 점프해(도약)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나는 떠날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모아온 책은 200여 권이 넘었기 때문에 우선 책을 상자에 넣어서 하나씩 묶으면 적어도 15 내지 20 상자는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가 결혼한 후 장만해서 사용하던 가구도 누구에게 빌려 주든가 아니면 창고에 보관하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뉴욕 총영사로 부임해 오신 장재용 총영사님은 나의 고등학교시절의 은사였기 때문에 나의 모든 짐을 뉴욕총영사관 지하실 창고에 보관해도 좋다는 승낙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영사관의 현지 채용 직원을 시켜서 승용차로 짐을 나르고 또 보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1963년 10월말에 하와이로 출발 했다. 나의 처 정현용은 첫째 아이를 임신 중이라 하와이에 정착하는 데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나 우리는 모든 어려움을 다 극복할 수 있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역사에 흥미 보였던 프랭크 볼드윈

내가 콜럼비아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할 때 에피소드 하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을 위해 미국정부가 지급하는 ‘지 아이 빌(GI Bill)’이라는 장학금이 있었다. 그 장학금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에게만 제공하는 장학금이다. 그 장학금을 받으면서 콜럼비아 대학원에서 한국역사를 전공하겠다는 미국 학생을 한 명 만난 일이 있다. 그의 이름은 프랭크 볼드윈(Frank Baldwin)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전쟁 휴전 직후 시간의 여유가 생겨서 한국역사의 사적지를 다 찾아다니고 한국의 역사유물은 다 관광해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역사를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은 한국 사람들보다 한국의 역사유적을 더 많이 탐방해 보았기 때문에 한국문화와 역사에 대해서는 한국 유학생들보다는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자부심이 매우 강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어와 한국역사를 열심히 공부하고 박사학위 논문은 3·1운동을 주제로 썼다. 한국의 현대사를 전공한 것이다.

우리 한국학생들은 전쟁에 시달리고 또 전쟁 후 수복된 서울에서 일상생활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느라고 여행할 시간의 여유도 없었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시간의 여유가 있는 학생도 역사의 유적지를 탐방할 생각보다 외국으로 유학하는 것이 그들 젊은 학생들의 꿈이었다. 우리의 것을 찾고 우리의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책을 읽고 역사사실을 암기해서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역사공부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역사공부도 많이 했다.

그러나 요사이 젊은 세대는 역사를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케케묵은 역사는 무엇 때문에 왜 배우냐고 반문한다. 유학생들에게 역사시험도 필수 과목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는 암기하는 과목이라고 인식돼 역사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은 거의 없다고 들었다. 나는 대학시절에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또 미국의 대학에서는 미국역사를 많이 공부했다. 미국에 살면서 미국역사를 모른다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내가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에 돌아가서 미국외교사와 미국정치역사를 가르치고 싶다고 말한 것도 이 ‘역사 공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피력된 것이었다.

<계속>

회고록 (37) 뉴욕 총영사로 부임한 중학 은사 … 특별한 결혼식 피로연

나의 동반자 정현용 박사

대한교육연합회 사무총장 鄭泰時 박사의 첫째 딸 정현용은 뉴욕주립대에 유학온 지 1년 후인 1963년 6월 22일 나와 결혼식을 올렸다. 뉴욕에서 제일 크고 매우 고전적인 리버사이드 처치(Riverside Church) 소강당에서 부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의 모든 단장은 콜럼비아대 장혜원 박사가 웨딩드레스부터 혼례의식 절차에 이르기까지 주관해 주고 보살펴 주었다. 장 박사는 연세대 장기원 부총장의 장녀로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약학과를 졸업한 후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화학을 전공해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격이 매우 온순하고 남의 일을 자기 일과 똑같이 희생적으로 도와주는 성격을 지닌 분이다. 장 박사는 정현용 혼례식의 모든 절차를 지휘감독하며 어머니 역할을 다 했다.

리버사이드 교회에서의 결혼식이 끝난 후 리셉션(피로연)은 교회 부근에 있는 국제회관 (International House)에서 열었는데, 결혼식에 참석한 100여명의 하객이 모두 참여해 우리 둘의 결혼을 축복해 주었다. 그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의 문정관으로 있다가 워싱턴에 와서 국무성의 한국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이 축사를 했는데, 매우 웅변적인 축사라고 호평을 받았다.

그의 축사가 끝난 뒤 장인어른(정태시 총장)께서는 장녀를 시집보내는데 느낀 감회를 한국식 유머를 섞어 가면서 영어로 답사를 하셨다. 어찌나 유머가 많고 또 훌륭한 스피치를 했는지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감탄을 연발했다. 자기는 딸을 다섯이나 두었는데 첫째 딸(賢溶)은 미국에 유학와서 결혼하게 되고, 덕분에 자신은 아들을 하나 얻었으니 이것을 교육자의 ‘후린지 베네핏(Fringe Benefit)’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시면서 많은 미국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 반면 우리 한국인 하객들은 미국식 유머(조크)를 잘 몰라서 그런지 그저 어리둥절하는 모습이었다. 장인어른은 『웅변 강론』으로 부터 『당신도 스피치할 수 있다』에 이르기까지 영어로 된 스피치 기법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출판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명 연설가로 유명했다. 그리고 KBS 라디오의 「새벽 명상」에 종종 출연해 명강의를 했기 때문에 팬레터도 많이 받으신다고 들었다.

나와 정형용과의 결혼식-1963년 6월 22일 Riverside Church 에서 거행.

나와 정형용과의 결혼식-1963년 6월 22일 Riverside Church 에서 거행.

리버사이드 교회 옆에 있는 국제회관에서 열린 우리 결혼식 피로연은 그렇게 축사와 답사가 이어지면서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웨딩 케이크를 잘라서 서로 나눠 먹고 커피 혹은 주스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눴다. 뉴욕 총영사로 와 있던 장재용 총영사는 한국인 20여명을 초청해 80번가에 있는 총영사 공관에서 우리 부부를 위해 만찬 겸 피로연을 베풀어 주셨다. 장 총영사님은 정태시 총장과는 원주에서부터 초등학교(국민학교) 동창이며 죽마지우였다. 그런 사적인 인연이 있어서인지 무엇보다 매우 기쁜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만찬을 마련했던 것이다.

장재용 총영사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시대(1910-1945) 원주에서 봉산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휘문중학교에 진학한 인물이다. 학생시절부터 운동선수로 축구와 농구를 매우 잘했다고 들었다. 집안이 부유해 농토를 소작인에게 빌려주는 지주의 아들이며 일본 동경의 中央大學 예과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리고 해방을 맞아 귀국한 후 잠시 동안 원주 판부면 단구리의 판부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장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해방 후 매우 혼란스러웠던 때에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주에는 단 하나 뿐인 원주농업고등학교의 교장선생으로 재직하던 정태시 선생이 장재용 선생님을 초빙해 국어와 영어를 가르치게 했다는 것이다.

장재용 뉴욕총영사와의 인연

원주농업고등학교에서 장 선생님은 농구도 매우 잘하고 또 배구선수들과 시합도 했다. 정태시 선생은 배구선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였다. 장 선생님은 단구리에서 자전거로 원주 정지의 농고로 출퇴근했다. 그 무렵 나는 한 시간 반 동안 걸어서 통학하던 때였다. 원주 시내를 걸어갈 때 장 선생님이 자전거를 타고 가시다가 나를 보시면 내려서 나와 함께 걸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오래된 사진 같은 60년 전 그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가슴 한켠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장재용 선생님은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운크라(UNKRA)로 불리는 한국부흥유엔기구에서 얼마동안 근무하셨다. 그와의 인연은 부산에서도 이어졌다.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준비한 뒤 나는 부산에서 미국유학 시험을 치른 뒤, 미국유학 여권을 수속해야 했다. 아무런 연고가 없던 부산에서 나는 며칠을 장 선생님 댁에 체류했다. 장 선생님은 운크라에 근무하실 때 한국외무부의 외교관 등용시험에 합격하고 서기관부터 시작해 주 뉴욕총영사로 진급해 부임하셨던 것이다. 중학교 시대의 인연 때문에 장 선생님은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는 피로연을 뉴욕 총영사관 관저에서 베풀어 주셨으니, 매우 기쁘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때의 그 가슴 따뜻한 고마움을 우리 부부는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신혼여행은 대서양의 아트란틱 시티(Atlantic City)로 가기로 했다. 내가 한국전쟁 당시 제7기 통역장교 훈련을 대구에서 받을 때 알게 된 동기생인 정세호 씨(전두환, 노태우와 대구공고 동기동창)가 뉴욕에 와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아트란틱 시티로 전임발령을 받고 그곳에 살고 있었다. 우리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자기 자동차로 아트란틱 시티까지 운전해 ‘모시겠다’고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아트란틱 시티는 도박으로 매우 유명한 카지노가 있는 곳이다. 미국 서부에는 라스베이거스가 있고 동부에는 아트란틱 시티가 있었기 매문에 도박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도박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카지노 같은 도박장에는 가지 않고 바다에서 해수욕을 즐기면서 2~3일 보내고 뉴욕시로 다시 돌아 왔다. 곧 본격적으로 박사학위 종합시험을 준비하고, 하와이 동서문화센터로 떠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됐기 때문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