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1950년대의 한국유학생 보충설명) 유학시절 친구들과 학술적 교우관계

1953년 한국전쟁의 휴전 협정이 이루어진 후 한국육군에서는 나의 군복무 기간이 3년이 넘었으니 미국 유학을 위해 예편제대가 바람직 하다는 결정이 나왔다. 따라서 나는 미국유학을 목적으로 제대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 육군에 복무할 때 매우 가깝게 지난 제7기생중 김명환 중위 (예일대학에서 전기공학 박사를 받고 코넬 대학에서 전기공학부 교수로 재직하다가 작고), 동기생 심완섭 중위는 한국군에서 소령으로 제대 한 후 뉴욕에 이민 와서 식품점을 운영했다. 나는 뉴욕에 가서 종종 만나고 옛날 이야기로 밤늦게까지 덕담을 했다. 그러나 몇년 전 식품 상점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해변가에 있는 샌디에고로 이주해 뉴욕을 떠났다. 그리고 제7기 동기생 몇 사람을 뉴욕에서 만났으나 넓은 미국대륙에서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기 때문에 서로 소식도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친구도 있고 또 아직 생존해 있지만 은둔 생활을 하는 친구가 많이 있다. 나는 캔터기 주의 애스베리 대학에 다닐 때 만난 유학생 몇사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애스베리 대학 캠퍼스 길 건너편에 있는 애스베리 신학 대학원 (Asbury Theological Seminary)에는 서울 이화대학의 부 교목으로 있던 조찬선 목사가 와서 신학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고 있었으며 조목사의 신학대학 친구인 강 스티브 목사도 와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목사는 여성관계로 문제가 생겨서 도중하차하고 귀국했다. 애스베리 대학에는 여학생 박동숙 (박상증씨의 여동생)과 로버트 정(1925년 애스베리 대학 졸업생) 나사렛 교회의 선교사의 딸등 두명의 여학생이 등록하고 있었다.

나는 겨울 방학이나 여름 방학에는 조찬선 목사와 함께 시카고에 올라가서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구해서 학비를 벌어 생활비에 충당했다. 대학교에서 지급하는 장학금은 등록금과 기숙사비만 부담했으나 다른 용돈은 본인이 겨울 방학과 여름방학에 아르바이트 해서 버는 것이 관례였다. 우리가 다니는 애스베리 대학에서 25 마일 떨어진 거리에는 렉싱턴(Lexington) 이라는 도시가 있었다. 렉싱턴에는 캔터키 주립대학 (University of Kentucky at  Lexington) 이라는 종합대학이 있었는데 노신영 씨(후에 한국에 나가서 외교관으로 복무하며 외무부장관, 국무총리 역임)와 이춘성 씨 (전북 전주의 미국공보원의 직원이였는데 유학 후에는 한국정부의 공보처장 역임), 또 이덕수씨는 한국에 나가서 웅크라 (UNKRA) 국제원호기구에 근무하고 있다고 들었다. 여성유학생으로는 이범준 씨가 홍일점으로 있었다. 후에 박정수 씨와 결혼하고 전두환 정권 때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활약했다. 박정수 씨는 외교부에 근무하다가 어디로 사라지고 소식이 두절되었다.

여름방학이 오면 나는 시카고에 가서 썸머 잡(여름 방학에 하는 아르바이트)을 얻어서 일하고 일년동안의 용돈과 잡비를 벌었다.

1950년대 초반의 시카고에는 유명한 시카고 대학이 있었고 또 초기 한인이민자들이 상항(샌프란시스코), 시카고, 그리고 뉴욕 등지에 정착한 곳이라 한국인 거류민이 몇사람 살고 있었다. 따라서 한인교회가 시카고에 있었고 지방에서 유학생들이 여름방학에 썸머 잡(방학동안의 일자리)를 구하러 왔다. 한인교회에 나가면 40-50명의 유학생들이 나와서 예배드리고 교회에서 제공하는 한국식 밥과 김치 등으로 점심을 때웠다. 한국인 여학생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서 그녀들을 만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시카고에 있을 때 서울 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 대학원에 유학중인 김치선 씨와 또 풀러 신학대학원에 유학 온 백예원 목사도 만나서 고국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 여름 방학 동안 주일날이면 한인교회에서 친지를 만나 함께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시카고 대학 캠퍼스에 가서 여러가지 시국에 대한 토론을 많이 한 것이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김치선씨는 한국에 돌아가서 서울대 법대교수로 학장을 역임했고 또 영락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나는 1957년에 애스베리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 있는 명문 대학 콜럼비아 대학원에 진학했다. 콜럼비대학에는 한국인 학부학생보다 대학원 학생이 더 많이 등록하고 있었다. 학부학생은 주로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세에 4년제 대학학부의 일학년에 입학하는데 한국학생은 2명이 등록했다. 그러나 콜럼비아 대학에는 일반인을 위해 4년제 대학이 따로 있었는데 “School of General Studies” (일반대학 혹은 성인 대학)이라고 하며 직장에 다니면서 대학을 끝마치지 못한 성인 학생들이 등록하고 대학 학부공부를 하는 곳이다. 우리 한국학생 중에는 10여 명이 등록하고 낮에는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직장에서 일을 끝마치고 오후 6시 혹은 6시30분 부터 8시반 혹은 9시 까지 강의를 듣고 3개 학점을 받았다. 내가 잘 알고 가까히 지낸 차문영이 학부를 끝마치었다. 그는 미국에 남아서 상점을 차리고 아이를 길러서 좋은 대학에 보냈다. 빅터 차는 차문영씨의 아들로서 콜럼비아 칼리지 (Columbia College)를 졸업하고, 콜럼비아 대학원에서 한미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는 그의 자문위원으로 박사학위 시험 뿐만 아니라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하는데 심사위원 중 한사람이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매우 우수했기 때문에 책으로 출판되어 많은 호평을 받았다. 지금은 워싱턴의 조지타운 대학의 교수로 있으며, 부시행정부에 발탁되어 백악관에 입성하여 안보담당 보좌관실에서 대 한반도 정책을 세우는데 공헌이 많았다.  현재는 조지타운 대학 외교연구원의 교수로 돌아와서 봉직하고 있다. 그는 나와 종종 만나고 또 장래의 학구적 공헌이 많을 것이라고 나는 기대하고 있다.

나는 1970년 가을학기 부터 미국동부의 코네티컷 주립대학 (University of Connecticut, Storrs)로 옮겨왔다. 내가 인디애나 대학을 떠나 코네티컷 주립대학으로 옮겨올 때 인디애나 동료교수들이 말렸다. 그러나 나는 옮기기로 결정했다. 첫째는 인디애나 대학은 중부의 중앙에 있기 때문에 매우 고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학술회의에 참석하는데 문제가 많이 있었다. 그 반면에 코네티컷 대학은 동부의 보스턴과 뉴욕의 중간지역에 있기 때문에 하버드 대학과 콜럼비아 대학에서 한달에 한번씩 모이는 동아시아 (중국, 일본, 한국 세미나)에 참석할 수 있고 당일 갔다가 그날 저녁에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거리상 편리했다. 그리고 봉급과 연구비 지원이 인디애나 대학보다 훨씬 좋았고 교수대우도 훨씬 좋았다. 인디애나에서 받는 봉급보다 2배가 넘었으며 학술 연구비도 많이 지원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나는 코네티컷 주립대학에 옮겨온 후 나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보완해서 캘리포니아 대학 출판부에서 출판할 수 있었고 또 여러 종류의 학술회의를 주체하여 논문집을 출판할 수 있었다. 인디애나 대학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학술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코네티컷 주립대학에 온 후 한국에서 오는 대학원생들에게 장학금을 지불할 수 있었고 또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대학원생들도 많이 도울 수 있었다. 내가 코네티컷 주립대학으로 부임한 후 한국에서 온 10여명의 대학원생이 공부하고 석사학위 와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에 나가서 학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중앙대학의 김동성 교수, 김동성 교수가 추천하여 온 최영진 교수도 우리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서울 시립대학에서 가르치는 김동수 교수, 경기대학에서 중국정치와 국제정치를 가르치는 남정휴 교수도 우리 대학원 출신이다.  연세 대학의 김기정 교수, 포항공대의 홍욱헌 교수, 통일연구원에서 상임 연구위원으로 근무하는 최춘흠 박사도 코네티컷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었다. 그리고 경희대학의 김병일교수, 우석대학의 김영석 교수도 코네티컷 대학의 방문교수였다. 그리고 권근원 교수, 국방연구원의 김경수 교수도 코네티컷 주립대학의 방문교수였다. 손태규 교수는 한국일보 기자로 코네티컷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하고 노스캐롤라이나대(University of North Carolina at Chapel Hill)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한국의 단국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나는 서울대학교 부설 국제대학원을 시작으로 고려대학 아세아문제 연구소 등 한국의 여러 국제관계연구소와 통일문제 연구소에서 개최하는 남북통일문제와 중소문제에 관련한 학술회의에는 1970년대 부터 1980년대에 걸쳐서 여러번 초청 받었다. 한반도 통일문제와 구소련, 중국, 미국등의 대 한반도 정책 학술회의에는 많이 초청받아서 참석했다. 학술회의에서는 한국의 저명한 여러 학자들과 만나고 또 학술서적의 교환도 많이 할 수 있게 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한국에서 개최된 한반도 통일문제와 국제학술회의에 초청받아서 한국에 나가서 만난 여러 학자와 교수 그리고 정부에서 연구하는 학술연구원의 석학들의 성함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는 없으나 나의 인상에 깊이 남아있는 학자 몇명을 여기 기록해 놓기로 했다. 1970년 고려대학교 아시아문제연구소와 국토통일원이 공동 주최한 한반도 통일문제 학술회의에 초빙해 준 김준엽 소장 (후에 고려대학 총장)에게 깊은 사의를 표하며 또 한국의 지성인 월간지 “사상계”의 발행인 장준하 선생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싶다. 고려대학 부설 아시아문제 연구소가 주최한 “국제정치와 남북한의 통일문제 학술회의”의 초청을 받고 “중공과 북한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나의 학술논문을 발표한 후 한국의 동아일보 와 중앙일보에서 크게 다루었다. “경향신문”의 조용준 편집국장은 나의 논문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경향신문”의 전면을 활용하여 나와의 인터뷰 기사를 썼다. 따라서 한국의 여러 국제문제 연구소와 학술지에서는 나에게 논문집필을 청탁하고 또 학술회의에 초청장을 보내기도 했다. 한국의 국제관계연구소(최종기 서울대학 교수가 소장)등 여러 연구소에서 학술논문 청탁 혹은 학술회의 참석해 달라는 초청을 많이 받아서 중공의 한반도 정책에 관한 연구논문을 작성하여 한국에서 발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김준엽 선생과 장준하선생의 후의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한국의 평화통일 자문회의 부회장 조향록 목사는 미국학자들을 부부동반으로 설악산 휴양소에 초빙하여 3박4일 혹은 5박6일의 회의를 하고 한국의 산업시찰도 하며 한국의 경제발전상을 볼 수 있었다. 조향록 목사님이 아직도 생존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의 마음속에는 항상 감사의 뜻이 우러나오고 있다. 그와 같은 평화통일 자문회의 통일분과 위원회의 학술연구회에 참석했을 때 만고 또 서신교류를 하게된 여러 학자와 언론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나에게 건네준 명함을 정리하면서 기억나는 몇분을 여기에 기록해 놓기로 했다.

숙명여자 대학교의 이경숙 총장, 한국정치학회 회장을 역임한 아주대학교의 김영래 교수, 민족화합통일운동연합의 박봉식 총재,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원장 신명순 교수, 한국정치학회 총무이사를 역임한 양병기 (청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외교통상부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실장 이동휘 박사, 국가안보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 김상민 박사,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외교학과 정재호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전인영 교수,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이종원교수, 명지대학교 황희철교수, 명지대학교 북한학과 이동복 객원교수, 한국정신분석정치학회장 백상천 박사, 한국 KDI 국제대학원 박현두 경제학 박사, KDI 국제대학원 김의성 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역사연구실 정용욱 교수, 명지대학 송종환 교수 등이 기억난다.

일본과 중국, 대만 등 외국대학의 교수도 많이 만났으나 지면관계로 생략하기로 한다. 미국에서 국제한국학회 (International Council of Korean Studies)를 김휘국 박사와 함께 창립하고 매년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는 과정에서 한국, 일본, 구소련 러시아와 중국에서 참여한 교수들의 명함도 상당한 수에 달했으나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혹시 명함이 없거나 또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이름이 빠진 친지 학자 와 연구소 친구들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빠진 분이 있다면 널리 용서해 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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